본 사이트 '시(詩)가 있는 인저리타임'에 2월 7일 실린 박미서 시인의 시 '봄 편지' 감상문을 '북미 거주', 필명 '창이'라고만 밝히신 독자께서 보내주셨기에 전문을 싣습니다.
신들의 고향에서 온 발신자 없는 ‘봄 편지’
입춘과 설날이 하루 사이로 이어지는 기해년 벽두에 박미서 시인은 우리에게 ‘봄 편지’를 보냈다.
셰익스피어는 ‘한여름 밤의 꿈’에서 “상상력이 알지 못하는 사물들의 모양을 드러내면, 시인의 붓은 그에 따라 공허한 것에 육체를 주고 장소와 이름을 정해 준다”고 했다. 시인들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상상력을 통해 새롭게 하여 ‘낯설게’ 만든다. 평범한 일상 세계도 시인의 붓에 의하여 낯설어지고 만다.
‘봄 편지’ 속의 시어들은 모두 우리에게 낯설어 보인다. 그러나 시를 감상한다는 것은 시인의 상상력에 다시 상상을 가하는 ‘상상의 상상’이란 메타작업을 한다는 것과 같다고 정의해 본다.
시인의 붓이 공허한 것에 육체를 주고, 장소와 이름을 정하기 이전으로 되돌아가서 ‘봄 편지’를 읽게 되면 시간 속에서는 일연의 단군신화를, 그리고 공간 속에서는 신생의 첫 날을 만나게 된다.
이 시에서 우리를 낯설게 여겨지게 하는 것 가운데 ‘풀벌레’와 ‘두 꽃 신’이 있다. 풀벌레는 한 여름이나 초가을에 만나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이 풀벌레에 ‘살짝’이란 말을 붙인 것은 상상력을 극대화 시킨다. 다시 말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시를 읽는 느낌을 신선하게 만들면서 계절의 감각을 앞당겨 느끼게 한다.
이 시에는 회화성繪畫性도 큰 역할을 한다. 시인은 Nicholas Hutchison의 작품을 시의 아래 부분에 삽화하였다. 그러나 이 삽화는 시의 전체 가운데 일부분일 뿐 전체는 아니다. 다시 삽화는 시를 확대할 수도 있지만 축소할 수도 있다. 이 삽화는 시의 8연 부분을 잘 묘사하고 있으나 시 전체를 그렇게 하기에는 부족하지 않나 생각한다. 나는 이 시에 차라리 산동성 ‘무씨사당 벽화 후석실’ 의 것을 넣어 이 시를 감상하고 싶다.
무씨사당 벽화는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와 95퍼센트 이상 같다고 한다. ‘봄 편지’를 이 벽화에 삽화해 시인의 시 세계로 아래와 같이 여행할 수 있다. 그리고 박 시인의 역사관과 우주관도 나름대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봄 편지’는 모두 8개의 연으로 나뉜다. 제 2연의 “정령들의 갈라진 흰 빛 무게는... 속마음 지새운 고향”은 석실 벽화 제 1층 조선의 하늘에서 환인과 환웅 그리고 풍사 우사 운사들이 사는 신들의 고향이다. 제 3-4연은 겨울이 가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하늘 고향을 떠나 새로운 세상을 향해 정령들이 서로 떠나고 헤어지는 장면이다. ‘발신자 이름 없이’란 한 구절이 이 세계가 우리 인간의 그것과 같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4 연의 ‘큰고니’가 빗소리 남기고 떠나는 것은 신들 간의 이별을 알리기에 극에 달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환웅은 환인에게 여러 차례 지상 세계로 내려가고 싶다고 한다.
“발신자 이름 없이” 일연의 삼국유사도 흉내 내지 못할 표현이다. 하늘나라 고향에서는 수신자도 발신자도 없는 편지가 오간다.
5-6 연은 아직 빗줄기 장대를 타고 환웅이 하강하는 장면, 빗줄기가 산등성이를 타고 내리꽂히는 장면으로서, 환웅이 3천 무리와 함께 하늘 위에서 하강하는 장면을 묘사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여기 까지는 삼국유사와 같아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7연에 있다. 시인은 ‘슬픈 신화의 무지개’라고 한다. 왜 갑자기 신화가 슬퍼지는가. 어느 문화 인류학자가 ‘슬픈 열대’라는 말 속에 잃어버린 신화의 슬픈 사연을 다 말하고 있듯이. 여기에 박 시인의 역사 의식과 현실 의식이 그대로 반영된다. 환웅이 당도한 땅은 갈라져 있고, 여인들은 위안부로 끌려가 없고, 하늘은 미세 먼지가 앞을 가리고, 김용균의 죽음으로 사람들은 광장에 웅성이고... 이것이 우리의 신화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아닐까?
일연에게서 슬픔이란 웅녀가 겪는 고행이지만 이는 웅녀 자신이 선택한 것이지 강요에 의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를 ‘슬픔’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시인이 사는 도시는 절망적인 슬픔이 가득 차 있다.
이런 현실과 유사한 현실이 벽화에 나타난다. 즉, 무씨사당 벽화가 삼국유사와 거의 같음에도 불구하고 위에서부터 두 번째 층을 보면 ‘동굴’이라고도 하고, ‘무지개’라고도 하는 그 안에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살해하려는 장면이 보인다. 종족과 종족 간의, 아니면 남성과 여성 간의 심각한 균열과 반목을 드러내는 장면이 보인다. 무엇이라 하던 시인의 슬픈 신화 속에 다 포함 시킬 수 있다. 이 장면은 삼국유사에는 빠져 있다. 이 빠진 부분을 시인은 7연에서 '슬픈 신화들의 무지개/낭만의 지붕을 얹은 둥우리/두 꽃신 속에 어우러지네/' 라고 한다.
벽화의 위에서부터 세 번째 층의 우측에 곰과 호랑이가 보이고, 곰의 입에서 새로운 생명이 나오는 장면이 보인다. 우리의 시인은 이 장면을 ‘두 꽃신 속에 어우러지네’로 처리하고 있다. 멋진 표현이다. 환웅과 웅녀가 합궁하는 방문 앞 섬돌 위 두 꽃신들의 어우러짐에서 시인은 우리 시대의 슬픈 신화를 희망으로 바꾸려 한다. 시인의 내면에서 이 시대를 읽으려고 하는 고뇌가 엿 보인다.
마지막 8연에서 시인은 하늘의 초사흘 달과 호수에 비추인 광경을 ‘눈썹모양의 달빛 연못’으로 그린다. 곧 7연의 두 꽃신은 ‘신생의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벽화의 마지막 장면은 ‘신생의 이야기’들로서 단군과 그의 후예들이 추수하여 곡간에 곡식을 거두어 드리는 장면이다.
이렇게 삽화를 바꾸어 미서 시인의 ‘봄 편지’를 독해했다. 그러나 이러한 독해가 시인의 시적 심상image과 같은가 다른가는 또 다른 문제일 것이다.
시를 서정과 서사로 크게 나누어 혹자들은 이 시를 서정으로 분류할 것이다. 그러나 서정과 서사는 분리될 수 없다고 한다. ‘봄 편지’ 속에 들어 있는 시의 종자들을 ‘상상의 상상’으로 풀어 읽으면 단군신화와 같은 서사시가 되지 않을까 한다. 서정이란 공허에다 서사라는 육체를 주고, 장소와 이름을 정해 주려는 시도 역시 가능하다면, 박 시인의 시와 단군신화는 서정과 서사 사이를 넘나드는 것이 아닌가 한다. 시인이 평소에 얼마나 우리 민족 역사와 문화를 사랑했는가를 아는 사람들은 이 말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초연에 대한 감상을 미루고 있다. 그 이유는 초연이 사실상 마지막 종연이고 그것이 2연과 대칭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초연과 2연을 한 번 대칭적으로 이어 부쳐 보면 시인의 시작법의 특이성을 발견할 수 있다.
가슴 가운데 나무의 무게는/정령들의 갈라진 흰 빛 무게는
검은 동공에 핀 꽃잎들/별 한아름 시간의 두 날개
새 발자국들 찍힌 구름/속마음 지새운 고향
초연과 2연은 대칭을 만들고 있다. 이렇게 6개로 분할된 시구들은 상하좌우 구별 없이 어디에 어디를 가져다 부쳐도 된다. 아니 더 의미롭고 아름답다. 즉,
가슴 가운데 나무의 무게는/속마음 지새운 고향
별 한아름 시간의 두 날개/새 발자국들 찍힌 구름
과 같이.
박 시인의 내면의 세계는 이들 시구들이 연계망을 만들고 있지만, 문장으로 표현될 때엔 직선적 나열이 돼 오히려 시상이 훼손될 수 있다. 연계망적 시상은 시인의 불교적 세계관의 반영이라고 본다. 이런 점은 시인의 다른 시에서도 발견된다.
6개의 시구들을 6각형의 꼭지점들에 하나씩 적어 넣고, 꼭지점과 꼭지점끼리 대칭을 만들어도(반영대칭), 6각형 자체를 시계바늘 방향(혹은 반시계 바늘 방향)으로 돌려도(회전대칭), 시상들이 서로 아무런 간격 없이 차이 없이, 그러나 ‘다르나 같게’ 이어진다.
결국 초연과 2연의 이러한 두 대칭 구조는 이 시의 결론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미서 시 ‘봄 편지’는 이렇게 번지수를 걷잡을 수 없다. 번지수가 없으니 발신자도 있을 수 없다.
이 시의 시제를 “신들의 고향에서 온 발신자 없는 ‘봄 편지’” 라고 했으면 어떨까 한다. 혹은 ‘발신자 없는 봄 편지’로도.
나머지 연들은 초연과 2연들이 두 대칭을 만들면서 자아내는 실올과 같다. 한올 한올 하늘의 초승달은 호수의 오직 한 곳에 반영될 뿐. 이것이 시인의 현실이고 역사가 아닐까. 그래서 시인에게서 신화는 역사의 연장일 뿐이다.
슬픈 신화들의 무지개
낭만의 지붕을 얹은 둥우리
두 꽃신 속에 어우러지네
창이
정월 초팔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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