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란, '시인의 양면일기' ... (4)당목

최정란 승인 2019.04.02 10:24 | 최종 수정 2019.07.22 18:31 의견 0
당목과 종 그리고 연화문. 사진=최정란

왜 하필 나에게?

주저앉는다. 무릎이 꺾인다. 괴롭고 아프다. 근본적으로 같은 고통도 있지만, 고통의 세목은 사람의 수만큼 다르다. 한 고통이 다른 고통을 밀어내기도 하고, 여러 고통이 한꺼번에 닥치기도 하고, 큰 고통 하나가 열 개의 작은 고통을 덮어버리기도 한다.

거부하고 싶지만 나의 거부나 수락과 상관없이 고통은 온다. 고통을 피해갈 수 없다. 그 사실을 알지만, 수시로 들이닥치는 고통 앞에서 당혹스럽다. 고통은 왜 오는가? 왜 반복되는가? 왜 하필 나에게?

자신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고통이 있다. 스스로 짓는 고통이다. 이 고통은 불만에서 생긴다. 불만은 욕망의 불충족. 마음을 바꾸고 욕망을 내려놓으면 해소된다, 그건 정말 말이 쉽다.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스스로와의 오랜 싸움과 긴 수련을 요구한다. 게다가 근본적으로 어쩔 수 없는 고통은 정말 어쩔 수가 없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고통도 만만찮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홀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함께 존재한다. 함께 존재하는 순간 그 사이에 관계가 발생한다. 기쁨을 주는 관계라면 좋겠지만, 모든 관계가 기쁨을 주지는 않는다. 안락보다 불편을 주는 관계가 더 많다. 그 사이에서 고통이 발생한다. 사랑해서 고통스럽고 미워해서 고통스럽다. 만나서 고통스럽고 헤어져서 고통스럽다.

적절한 거리

가까이 다가가면 서로를 가시로 찌르고, 멀어지면 동사하는 고슴도치의 딜레마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 딜레마로 인간관계를 비유한 쇼펜하우어는 사람에게 깊이 상처 입은 것 같다.

절대고독의 자리에 홀로 있으면서 외로움으로 얼어 죽을 것인가, 외로움을 못 견뎌 깊이 껴안다가 가시에 찔린 상처가 덧나 죽을 것인가. 관계는 적절한 거리를 필요로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적절한 거리 유지는 매우 중요하다. 그 적절한 거리는 사람마다 다르다. 모두에게 공통으로 적용될 수 있는 객관적 거리란 없다.

내가 충분히 가깝다고 여기는 거리를 상대는 여전히 아득히 멀다고 느낀다. 나는 따뜻한 거리까지 다가가지만, 상대는 여전히 얼음처럼 차갑다고 느낀다. 나는 서늘한 거리를 유지한다고 믿지만, 상대는 너무 뜨거워 화상을 입는다.

냉정과 열정 그 사이에서 인간은 끝없이 상처받고 끝없이 외롭다.

음악을 부르는 관계쌍

불편하고 아픈 관계는 대체로 피하게 된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관계, 어쩔 수 없는 관계가 있다. 반복되는 고통을 주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쌍으로 존재하는 관계가 있다. 폭력적 관계이다. 그러나 그 관계가 음악을 낳을 때 사랑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바이올린과 활의 관계가 한 예일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바이올린이라 하더라도 홀로 스스로 소리나지 않는다. 활로 현을 문질러야 소리가 난다. 반복되는 마찰은 바이올린에게도 활에게도 고통일 것이다. 반복되는 고통이 없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 고통이 만드는 처음의 불협화음은 끝없는 연습을 통해 감동적인 하모니와 리듬을 지닌 음악으로 다시 태어난다.

현악기의 아름다운 음악은 이렇게 반복되는 마찰이라는 반복되는 고통에서 탄생한다. 이따금 현이 끊어지고, 몸통이 갈라지고, 활의 말총이 닳고 끊어진다. 바이올린 소리는 고통스런 비명소리의 내면화이자 울음소리의 승화일지 모른다.

타악기도 마찬가지이다. 북과 북채도 반복되는 새디즘과 매저키즘의 관계쌍이다. 북채는 북을 두드려서 악기의 몸 안에서 자고 있는 음악을 깨우고 불러낸다. 그 과정에서 혁명을 부르고 심장을 들끓게 하는 뜨거운 북소리가 흘러나온다. 사랑하기에 아프게 해야 하고 사랑하기에 아파야 한다.

당목은 갈라터지고 연화문은 금빛으로 빛난다. 사진=최정란

그 이름, 당목

저녁 종소리 듣는 게 좋다. 저녁 종소리를 듣기 위해 이따금 통도사에 간다. 산사를 휘감고 먼 하늘과 먼 땅으로 멀어져가는 종소리를 듣는다. 통도사 사천왕문을 들어선다. 왼쪽에 범종각이 있다.

범종을 치는 통나무막대에 눈이 간다. 갈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쇠로 테를 씌워두었으나, 이미 통나무막대는 세로로 쩍 쩍 갈라져 있다. 저 통나무막대 이름은 무엇일까. 수십 년 종치는 통나무막대를 보았으나, 그 이름을 알지 못하다니. 더불어 존재하는 것들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다. 사전을 찾는다.

당목. 칠 당, 즉 당구 할 때 당, 친다는 뜻이다. 나무 목. 무언가를 둔중하게 치는 막대기를 당목이라 한다. 당구장에서 일명 큐대라 부르는 것도 당목의 일종이다. 당구장 큐대는 공을 치고 절의 당목은 범종을 친다. ‘치다’와 ‘두드리다’는 비슷한 뜻을 가졌고 혼용되어 쓰이지만, ‘당’은 ‘타’와 무게감이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난타의 ‘타’가 경쾌하게 두드리는 느낌이라면, 당목의 ‘당’은 둔중하게 밀어 치는 느낌이다. ‘타’는 가벼움과 빠름을 지향하고 ‘당’은 약간의 무거움과 느림을 더한다. ‘타’는 가죽을 두드리고, ‘당’은 청동을 친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채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 절의 범종을 치는 통나무가 나에게는 그랬다. 오랫동안 그 이름이 궁금하지 않았다. 무심코 그런 통나무가 있나보다 했을 뿐. 어느 날 그 통나무를 칭하는 이름이 갑자기 궁금하다. 통나무가 닿은 자리와 닿지 않은 다른 자리가 많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고부터다.

발견

당목이 닿은 자리는 금빛이다. 당목이 닿지 않은 자리와 빛깔이 다르다. 주조한 후 얼마간 시간이 흐른 범종에는 시간의 흔적이 남는다. 이윽고 시간의 녹이 종을 에워싼다. 범종은 이미 오래 전부터 청동빛이다. 당목이 닿은 자리만 환한 금빛이다. 그 자리에 연화문이 있어, 연꽃이 피어난다. 연화문 지름 굵기의 당목이 오랜 세월 주기적으로 반복해서 종을 쳤음이 짐작된다.

연화문은 단순히 종교적 상징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오래 전 범종장인의 신호이다. 후세 사람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이다. 종치는 매뉴얼이기도 하다. 종을 칠 지점, 종을 칠 당목의 굵기, 얼마나 자주 쳐야 할지, 종치기의 빈도를 지정한 것이다. 연화문의 지름이 당목의 굵기가 된다. 얼마나 자주 칠지는 연화문의 금빛이 결정한다. 빛나기를 유지하도록 규칙적으로 반복해서 쳐야 할 것이다.

당목을 타격을 당하지 않은 범종의 연화문은 어두운 청동빛을 벗어나지 못한다.

종소리를 내기 위해서, 어디를 쳐야 할지, 어느 정도 굵기의 당목을 써야 할지, 종을 주조할 때 범종을 만든 장인이 미리 설계했음이 분명하다. 장인은 형태가 완성된 범종에 당목이 닿을 자리를 정한다. 그 자리에 연꽃 문양 외곽선을 그리고 음각으로 새겨 넣는다. 연이어 도드라지는 양각으로 연꽃잎을 살짝 부풀린다.

종의 뒷면, 금빛 연화문의 대칭이 되는 자리에도 같은 크기 같은 무늬의 연꽃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통나무가 반복해서 쳐주지 않은 부분의 연꽃은 녹슨 청동빛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마치 시간의 진흙 늪에 갇힌 것처럼.

종을 쳐야할 지점의 연화문이 녹슬었다면, 그것은 종치는 임무를 맡은 수행자가 종치기를 게을리 했음을 의미한다. 부지런히 종을 쳐라. 그것이 수행일 것이다. 종치기는 무명을 갈고 닦는 일의 은유일 것이다. 그러면 금빛으로 빛날 것이다.

장인이 이 지점을 정한 것은 단순히 금빛 연화문이라는 시각적 이미지를 위해서가 아니다. 종소리라는 청각적 이미지를 가장 맑게 울리게 하고 멀리 보내기 위해서이다. 종소리라는 본래 목적을 충실히 구현하는 과정에서 연꽃은 더불어 피어난 것이다.

시간예술 종소리가 사라질 때 시각예술 연화문이 종의 몸에 남아서 종소리의 울림을 증언하는 것이다.

같은 지점을 반복해서 강타하는 일은 숨은 무늬를 드러낸다. 그 자리에서 예술이 꽃피고 구원의 종소리가 울려나온다. 단순한 일의 반복은 아름답고 숭고하다. 사물의 숨은 무늬를 드러내는 예술이자 수행의 기본이 된다.

청동빛을 배경으로 피어난 금빛 연화문이 찬란하다. 당목이 닿은 자리에 금빛의 연꽃이 피어났다. 만물은 시간이 흐르면 녹슬고 삭아 없어진다. 저 연꽃은 그 누구도 이겨내지 못하는 시간을 이겨낸 것이다.

자세히 보면 보인다. 종이 원래 가지고 있던 무늬들, 당목이 두드리지 않았다면 녹슬어 시들었을 연꽃이, 종소리가 울릴 때마다 환하게 금빛을 더해간다.

사랑, 패배하는 새디스트와 승화하는 매저키스트

당목은 아침저녁 날마다 범종을 친다. 당목은 적극적인 가학의 성질을 지닌다. 스스로 부서지며 종을 치는 자리에 놓인다.

고통이 반복해서 종의 몸을 쳐주지 않으면 무늬는 녹에 파묻힌다. 얻어맞는 범종은 고통스러울 것이다. 몸이 깨질까 두렵기도 할 것이다.

치는 당목도 범종 못지않게 고통스러울 것이다. 나무는 찢어지고 찢어지기를 반복하고, 버려지고 버려지기를 반복한다. 당목의 상처와 죽음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처럼 단박에 오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종을 칠 수 없을 때까지 반복해서 머리를 들이박으며 당목의 몸이 찢어진다. 상처입고 죽어간다. 나무가 쇠를 치다니, 나무의 패배는 판판이 예정된 것이다. 그러나 나무의 패배 없이 종소리는 울리지 않는다.

범종은 명예를 얻는다. 삼천대천세계의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는 종소리를 아득히 멀리까지 보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뭇 중생은 종소리를 울리기 위해 머리가 깨어지고 몸이 찢겨져나간 수천 개의 당목의 존재를 기억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채, 몸이 찢겨진 당목은 어느 날 아궁이로 던져진다. 그리고 다른 통나무가 다시 그 자리를 대체한다.

대체불가능의 존재가 된 범종은 피학적 사랑의 영원성을 울음으로 노래하고, 대체가능한 당목은 가학적 사랑의 흔적을 남겨두고 몰락한다. 유한성을 삼키며 침묵의 재가 된다. 그 사랑은 몸의 몰락이자 종소리로서의 승화이고, 몸의 패배이자 금빛 연화문을 몸에 입히는 승리이다.

나무는 속울음 울며 말하리라. 나의 몰락이 금빛 연꽃으로 피어난다면, 종소리로 울린다면, 기꺼이 사랑으로 몰락하리라.

범종은 나날이 울며 얻어맞는다. 수동적 피학의 자리에 놓인다. 어쩔 수 없는 매저키스트여야 한다. 그렇다면 둘 사이에 발생하는 고통은 단순한 폭력을 넘어서는 아픈 사랑이 된다. 표면의 폭력과 내면의 폭력이 다를 수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 둘의 관계를 고통스런 사랑 말고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나.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 치는 운명과 맞는 운명. 둘 다 어쩌지 못하는 사랑의 운명이라 하자. 서로가 아프게 만나지 않으면 종소리도 금빛연꽃도 없으니, 예술을 낳는 사랑의 운명은 이렇게 아프다.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자신이 가진 무늬가 금빛이라는 것도, 심지어 자신이 연꽃을 품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녹슬어가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저 연화문은 결국 반복되는 고통이 피운 것이다. 고통과 마찰, 갈등이 없는 관계는 빛나지 않는다.

관계는 다양하게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서로를 빛나게 하는 관계가 있다, 한쪽을 빛나게 하는 관계가 있다. 한쪽의 희생을 강요하는 관계가 있다. 한쪽을 녹슬게 하는 관계가 있다.

편안하지만 녹슬게 하는 관계가 있다. 고통스럽지만 빛나게 하는 관계가 있다. 당장은 빛나게 하는 것 같지만 시간이 흐르면 상대를 녹슬게 하는 관계가 있다. 당장은 불편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상대를 빛나게 하는 관계가 있다.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관계는 미래에 어떻게 진행될지 알 수 없다. 미래는 불확실하다.당장은 어떻게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길게 보면 선택의 여지가 없다.

고통 역시 선택과 상관없이 온다. 운명적으로, 우연히, 혹은 필연적으로 온다. 누가 고통을 선택하겠는가. 고통의 선택은 없다. 부득이하게 닥쳐오는 고통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을 뿐이다 그렇다면 고통을 대하는 자세만 남는다. 결국 우리의 문제는 그 고통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의 문제가 된다.

고통을 대하는 자세

인간은 강한 척 해봐야 시간 앞에서 속수무책 몰락한다. 참으로 연약한 존재다. 연약하다는 것은 잠재적 고통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과장한다면 인간은 고통 받기 위해 세상에 온다. 고통 속에서 아름다운 종소리를 내기 위해 온다, 태어나기 전부터 자신의 몸과 영혼에 새겨진 아름다운 금빛 무늬를 발견하기 위해 온다.

고통만이 우리가 녹스는 것을 막아준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랫말은 고통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말의 역설적 동의어가 된다.

고통이 삶의 기본속성이라면, 고통은 회피할 것이 아니라 직시하고 기꺼이 수용할 것이 된다. 역설로 들리겠지만, 고통은 삶을 조금 더 견딜 만하게 만든다.

행복을 삶의 기본속성으로 삼으면, 더 많이 불행하다. 당연히 행복해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행복을 얻기에 실패할 때마다 좌절하게 될 것이다. 작은 행복이 오면 더 큰 행복을 바라게 된다. 행복한 순간이 와도 당연하게 여긴다면, 삶은 견디기가 어렵다. 삶에서 행복을 얻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행복한 시간은 쉽게 오지 않는다. 드물게 행복이 온다고 해도 행복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오히려 고통이 삶의 기본속성이라고 생각하면, 행복한 순간이 얼마나 예외적인 사건이며 위대한 선물인지 알게 된다. 짧고 작은 행복에 감사하게 된다, 행복하지 않은 순간에도 불평을 거두게 된다.

행복은 예외적인 기적이다. 당연한 것이 아니라 감사해야할 특별한 놀라움이다. 그렇다면 행복의 크기를 저울질 하거나 더 큰 행복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작은 행복을 최대한 크게 기쁘게 누리는 법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사이 짧은 행복을 기뻐하는 법을 터득하고 긴 불행을 견디는 법을 알게 될 것이다, 짧은 행복을 밀도 있는 행복으로 바꾸는 법을 알게 될 것이다. 불행이 불행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불행을 과장하지 않는 법을 알게 될 것이다.

고통은 삶을 빛나게 한다

빛나는 사람은 반복되는 고통에게 옆구리를 내준 사람이다. 그는 오래 견디는 종소리로 멀리 오래 세계에 울려퍼진다. 우리를 빛나게 하는 것은 고통이다. 그렇다면 고통이 오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고통은 우리를 빛나게 하기 위해 우리에게 온다.

반복해서 한 곳을 강타하는 고통은 일회용 고통보다 견디기 어렵다. 고통은 왜 아픈 곳을 반복해서 두드리는가. 가장 약한 곳을 거듭 두드리는가. 가장 약한 곳이 가장 아름다운 무늬가 숨겨진 곳이기 때문이다.

가장 약한 사람에게 가장 많은 고통이 온다. 그가 가장 아름다운 무늬가 숨겨진 자리이기 때문이다. 언제인가 금빛으로 빛나며 연꽃을 피울 자리이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상처는 시간이 어쩌지 못하는 금빛 찬란한 연화문의 설계도를 실행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시간은 청동을 녹슬게 한다. 당목이 반복해서 치는 자리는 녹슬지 않는다. 심지어 금빛이다. 삶에는 우리가 모르는 무늬가 새겨져 있다. 충분히 치고 두드려주지 않아 녹슬었을 뿐이다. 자세히 보지 않아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예술은 삶에 내재된 무늬를 드러낸다. 예술가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고통에게 생의 옆구리를 내주는 존재인지 모른다. 온 몸과 영혼으로 시간의 녹을 막으려 애쓰는 존재인지 모른다.

 

최정란

◇최정란 시인은
 
▷경북 상주 출생

▷계명대 영어영문학과 계명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3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사슴목발애인< 입술거울> <여우장갑> <장미키스>

▷제7회 시산맥작품상, 2017년 세종도서 문학나눔

cjr1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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