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란, ‘시인의 양면일기’ ... (2)개화開花

최정란 승인 2019.02.17 18:38 | 최종 수정 2019.07.22 18:30 의견 0

버뮤다제라늄 꽃이 피기 시작했다. 지난 주부터 봉오리들이 눈에 띄게 통통해지더니 엊그제 첫 꽃송이가 활짝 피기 시작했다. 피고 지고 피고 지며 여름까지 고운 빛을 줄 것이다.

짙은 마젠타로즈 빛 꽃이 핀 화분은 재작년에 모셔왔으니 내 집에서 두 번의 겨울을 보내고 세 번째 꽃을 보여주고 있다. 추위와 건조 속에서 안 죽고 살아남은 게 신통해서 작년 봄에 큰 화분에 옮겨주었더니 제 멋대로 가지들을 뻗어간다. 몸담은 세계, 베란다 전체를 탐색할 기세다. 제 집이라는 확신이 든 모양이다. 그곳이 허공의 사막이란 것을 알고 나면 얼마나 허망할까.

꽃잎의 바깥 꽃분홍색이 짙고 농염하다. 꽃잎의 내부는 더 캄캄하고 어둡다. 빨아들이는 느낌이 있다. 세상을 좀 알 것 같다.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성숙한 여인의 비밀 같다. 기꺼이 매혹된다. 향수라면 오 뒤 스와르.

흰색과 분홍색 섞인 꽃이 핀 두 번째 화분과 봉오리 맺은 세 번째 화분은 작년에 입양했으니 내 집에서 한 번 겨울을 난 것들이다. 화분을 중심으로 수형이 둥글고 예쁘게 자라고 있다. 줄기도 굵고 짤막한 것이 튼실하다.

꽃잎 색이 밝고 경쾌한 분홍이다. 꽃잎의 내부는 흰색이다. 애초에 비밀 같은 것이 생기기 이전의 순수가 내면을 채우고 있다. 소녀의 명랑과 수줍음이 동시에 내비친다. 곧 누군가를 설레게 하고, 잠 못 이루게 하고, 창문 밑으로 달려와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게 할 것이다. 향수라면 미스 디올.

여름내 베란다 바깥 철제 화분대에서 키우다가 늦가을에 베란다 안으로 거두어 들였다. 집사의 게으름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알아서 진 날 마른 날 개의치 않고 꾸준히 꽃을 피워주었다.

같은 꽃인데도 세 번째 화분은 조금 늦게 봉오리가 왔다. 똑 같은 환경에서 똑 같은 물, 똑 같은 햇볕을 받아도, 개화시기가 다른 것을 보며, 꽃을 피우는 데는 내면의 감수성도 큰 몫을 한다는 걸 짐작한다. 그 감수성의 속도가 제각기 다르다는 것도.

사람도 그렇겠지. 일찍 꽃피는 사람도 늦게 꽃피는 사람도 있겠지. 왜 다른 꽃처럼 빨리 피지 않느냐고 꽃에게 매질을 할 수 없는데, 사람의 학교 교실에서는 참 잘도 회초리를 휘둘렀겠지.

느리든 빠르든 제 속도대로 피면 되는데. 제 속도로 제 때 제멋대로 피어야 아름다운데, 빨리 자라라고 꽃 모가지를 뽑아 올리고, 더 빨리 피라고 덜 자란 꽃잎을 감싼 꽃받침, 껍질을 깠겠지. 그것이 얼마나 큰 폭력인지도 모르고.

같은 날 치르는 학교시험이나 수능시험이 공평한 것 같지만, 한 날 한 시에 무언가를 시험한다는 것이 살아있는 생물에게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일인가.

게으른 엉터리 정원사인 나는 꽃봉오리가 맺히고부터 아침마다 부지런히 베란다로 나가 식물들과 눈을 맞추고 말을 걸어준다. 잘 잤니? 힘들지?

첫 생리를 시작한 딸을 바라보는 어미 심정이 이럴 것이다. 기쁨과 애틋함. 꽃봉오리가 맺히면 매일 물을 흠뻑 준다. 내 사랑도 꽃으로 흘러간다. 손바닥 정원에서도 정원사가 게을러서는 안 될 때가 있다.

최정란 시인

◇최정란 시인은

 

▷경북 상주 출생

▷계명대 영어영문학과 계명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3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사슴목발애인< 입술거울> <여우장갑> <장미키스>

▷제7회 시산맥작품상, 2017년 세종도서 문학나눔

cjr1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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