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가 있는 인저리타임] 산벚나무에 이력서를 내다 / 최정란
최정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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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3 15:37 | 최종 수정 2019.03.23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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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벚나무에 이력서를 내다 /최정란
잎 지으랴 꽃 빚으랴 바쁜 나무
봄이 주문한 꽃들의 견적서를 쓰고
잎들의 월간 생산 계획을 짠다
가장 알맞은 순서도에 따라
발주 받은 꽃들을 완성한다
납기에 늦지 않게 꽃들을 싣고
좁은 가지 끝까지 빠짐없이 배달하려면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
안으로 지치고 굳은 옹이를 쓰다듬는 나무
연말 결산은 붉은 낙엽으로 다 털고
대차대조표에 빈 가지만 남아도
봄이면 다시 꼼꼼하게 부름켜를 조인다
제 몸의 스위치를 올려
가지와 뿌리를 닦고 기름친다
나도 나무공장에 출근하고 싶다
숙련공 아니어서 정식으로 채용이 안 된다면
꽃 지고 난 뒷설거지라도
나무를 거들고 싶다
첫 월급 봉투처럼 두근거리며
봄인 나무와 딱 한 번, 접 붙고 싶다
-최정란 첫 시집 <여우장갑>
<시작노트>
벚꽃이 왔다.
꺼번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꽃들이 쳐들어왔다.
꽃들의 기세가 황홀하다 못해 무섭다. 떠나기 위해서 저렇게 몰려오다니.
우리 모두는 떠나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우기 위해서 저렇게 맹렬히 아름답다니.
저렇게 가지 끝까지 꽃을 피우자면 얼마나 바쁠까. 뿌리와 줄기를 풀 가동하는 나무라는 공장을 상상한다.
산벚나무는 한 발자국 늦게 꽃이 온다. 꽃만 먼저 오는 게 아니라 잎과 함께 손잡고 온다, 얼마나 더 바쁠까. 일손은 모자라지 않을까.
바쁜 것을 그냥 바라보기만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다. 무언가 도와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매혹된다. 불의 상상이 가동한다.
한 발자국 늦게 오는 산벚나무가 봄날의 애인이다.
절판된 시집에서 건져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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