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란, '시인의 양면일기' ... (3)지연 Delayed

최정란 승인 2019.02.25 10:23 | 최종 수정 2019.07.22 18:31 의견 0

인천행 승객들이 탑승구를 빠져 나간다. 제주행, 타이페이행, 하노이행이 이륙한다. 내가 탈 비행기보다 나중 출발 시간대 스케줄의 승객들이 몰려 들어왔다가 빠져나가기를 여러 번이다. 새벽같이 호텔을 나와 벌써 몇 시간째 후쿠오카공항에서 대기 중이다.

오전 중에 집에 도착해야 하는데, 비행기를 타기도 전에 오전이 휙 다 지나갔다. 전광판에는 지연 표시조차 없는데. 탑승구 직원이 방송으로 부산행 비행기의 출발 지연 이유를 알린다. 도착지 김해공항 활주로 사정 때문이다. 갑작스런 큰 비로 착륙이 불가능하다.

이륙은 착륙을 전제로 한다. 착륙이 이륙을 결정한다. 안전한 착륙이 보장되지 않으면 이륙해서는 안 된다. 이륙은 이륙하는 공항의 안개, 구름 같은 기상상태 못지않게 착륙하는 공항의 활주로 상태와 관련이 있다. 이곳이 아무리 맑아도 그곳 활주로가 물에 잠겼다면 이곳에서 비행기는 이륙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를 알게 된다.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지금 이곳만의 일이 아니다. 나의 출발은 이곳 날씨뿐만 아니라 저곳 날씨와 연결되어 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이곳의 일은 보이지 않는 저곳 혹은 그곳의 상황과 연결되어 있다. 세상의 많은 일들도 그렇지 않은가.

마음이 잠시 오래 전 우리 집 마당으로 돌아간다. 하는 일마다 실패하던 아버지는 우리 집 마당에서 아주 잠깐이지만 시멘트 벽돌, 일명 부로쿠 공장을 하셨다. 넓은 마당은 새 집을 짓기 위한 벽돌을 직접 찍고 건조시키는 작업장이 되었다.

모래 차가 들어오고, 시멘트 차가 들어왔다. 레미콘 차량이 보편화되지 않았을까. 반죽을 섞는 일은 전적으로 인부들의 수작업으로 진행되었다. 시멘트 벽돌을 만드는 과정은 매우 간단했다.

어른 허리만큼의 높이로 원뿔모양 모래 무더기가 만들어진다. 그 모래성의 꼭대기 가운데를 파고 시멘트를 넣는다, 그리고 그 가운데를 다시 파고 물을 붓는다. 그리고는 인부들이 둘러서서 삽으로 모래를 섞는다. 삽날이 뾰족하지 않고 일자로 넓적하게 생긴 삽이었다. 모래, 시멘트, 물의 비율까지는 모르겠다.

인부들이 잘 섞인 콘크리트 반죽을 한 삽씩 푹푹 퍼 올려 나무로 만든 몰딩, 틀에 넣는다. 삽으로 반죽을 다지듯 두드리고 틀을 빼낸다. 두 개의 큰 구멍이 뚫린 시멘트 벽돌 모양이 만들어진다. 무정형의 반죽이 정형의 벽돌로 탈바꿈한다. 마당에 가지런히 수천 장의 시멘트 벽돌이 줄지어 선다.

삽질에는 묘한 리듬이 있다. 지금이야 삽질이라는 말이 성과가 없는 헛된 반복을 의미하는 말로 자주 쓰이지만, 기계화와 자동화 이전의 삽질은 일하는 사람의 노동과 그 노동의 성과가 바로 눈앞에 나타나는 구체적인 몸의 행위였다. 떠들썩하게 웃는 소리와 사람들이 흥성거리는 마당의 모습이 어린 눈에 보기 좋았을까. 벽돌을 찍는 날은 마당에 줄지어 서는 벽돌을 가로 세로 곱셈을 해가며 삽질을 지켜보곤 했다.

이제 마르기만 하면 된다. 벽돌이 다 마를 때 까지는 소나기가 오지 않아야 한다, 곰살뫼 너머 충북 영동역 기차소리가 산을 넘어 들려오면, 영락없이 비가 왔다. 비를 품은 구름이 많은 날, 저기압은 소리를 높이 밀어 올리는 대신 멀리까지 밀어 보냈다. 맑은 날은 기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시멘트 벽돌이 마르는 동안 수시로 기차소리가 들려오는지 아닌지 귀를 기울이곤 했다. 라디오 일기예보가 잘 맞지 않던 시절이다.

맑은 날이 계속되는 운 좋은 날이었다. 벽돌이 잘 마르겠네.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잘 마른 시멘트 벽돌에 인부들이 호스로 시원하게 물을 뿌려주고 있었다. 그토록 비를 걱정하더니, 잘 말라가는 벽돌에 물은 왠 말? 의아함은 저녁 밥상에서 아버지가 풀어주셨다.

양생을 해야 해. 단박에 마르면 충분히 단단하지가 않아. 겉은 마른 것 같아도 속이 푸석푸석해. 경도가 떨어지면 아무짝에도 못 써.

사전을 찾아보았다. *양생. 1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해서 오래 살기를 꾀하는 것. 2 콘크리트가 굳을 때까지 수분을 충분히 공급하고 충격을 받지 않고 얼지 않도록 보호 관리 하는 일.

굳는데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견고한 벽돌을 얻기 위해서는 의도적으로 건조를 지연시키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 지연의 방법이 조금 전까지 그토록 피해야 하는 물을 적극적으로 뿌려주는 것이다. 속속들이 흠씬 젖도록. 물은 벽돌을 단단하게 만드는 같은 목적을 위해서 피하거나 받아들여진다. 피해야 할 것과 받아들여야 할 것은 시간대만 달리 할 뿐 같은 것이었다.

겉이 마른 벽돌에 다시 물을 주기를 서너 번 반복한다. 그리고 바짝 건조시키면 벽돌이 완성된다. 이제 벽돌은 튼튼한 담이 되고 단단한 벽이 되고 안전한 집이 될 것이다. 잘 건조된 시멘트 벽돌로 쌓을 담과 아름다운 집과 그 안에 살 사람들을 상상하는 것이 좋았다.

인생의 낱말 목록이 한 줄 추가 되었다. 수집한 인생의 여러 말 가운데 ‘양생’은 특별히 또렷하게 남았다. 불가능한 불로장생과 더불어 시간의 지연을 가리키는 말로 나에게 왔다. 단박에 이루어지지 않는 꿈도 양생이라는 말과 함께 왔다.

무언가 지연될 때가 있다. 무언가 늦춰 질 때가 있다. 마음은 바쁜데, 일은 마음대로 잘 되지 않는다. 일은 마음 뒤에서 질질 끌리듯 따라온다. 아예 어디쯤에서 길을 잃었는지, 감감무소식이다. 언제부터 마음과 끊어진 것인지 아예 따라오지 않는다. 이 일을 매듭지어야 다음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낭패다.

비행기야 바다 건너 활주로 사정이 좋아지면 곧 이륙하지만, 인생의 일들은 활주로가 아예 없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비가 영원히 개지 않을 것 같은 날들은 또 얼마나 많으며, 가도 가도 오리무중의 안개 속 같은 날들은 얼마나 많은가.

만사가 다 늦춰지는 것 같다, 나만 뒤처진 것 같다. 세상은 나만 뒤에 남겨 두고, 빠르게 앞으로 달려간다. 계획이 다 틀어진다. 다음 계획을 진행할 수가 없다. 초조하다. 우울하다. 나는 실패자인가. 아, 나는 너무 늦었어. 구제불능이야. 안 그래도 지각인생, 더 늦어지다니. 이 자괴감 어찌 하나. 슬픈 나날들.

초조하지 말자. 안달하지 말자. 푸석푸석하고 허술한 나의 삶이 양생의 과정에 들어선 것이다.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물벼락이 필요한 것이다. 엉성하고 구멍이 많은 삶이 단단해지기 위해서. 외부의 바람과 충격을 거뜬히 견딜 수 있을 만큼 강해지기 위해서.

무언가 지연되고 있다. 무언가 늦춰지고 있다. 푸석푸석한 나에게 단단해지라는 시간의 메시지를 던지는 이 누구인가. 바닥이 보이는 나의 시간을 한없는 기다림으로 탕진하게 하는 이 누구인가. 나는 푸석푸석한 채로 그냥 나여도 좋은데.

그렇구나. 푸석푸석한 채로는 아무 쓸모가 없구나. 양생의 시간을 받아들일 수밖에. 기꺼이. 그런데, 지금 이곳의 나는 보이지 않는 어디의 무엇과 연결이 되어 있을까.

최정란 시인

◇최정란 시인은
 

▷경북 상주 출생
▷계명대 영어영문학과 계명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3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사슴목발애인< 입술거울> <여우장갑> <장미키스>
▷제7회 시산맥작품상, 2017년 세종도서 문학나눔

cjr1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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