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가 있는 인저리타임] 구구소한도 / 최정란
최정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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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5 13:52 | 최종 수정 2019.03.05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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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구소한도 / 최정란
살얼음이 동치미 국물을 가두는 동지, 어둠이 열두 폭 향기를 칭칭 동여매는 긴긴 밤, 멀리서 전언이 온다 봄이 출발한다 봄이 출발한다 바람이 고삐를 당기자, 먹으로 윤곽을 그린 꽃 창호지 팽팽하다 가파른 눈길 아홉 번 미끄러지고, 아홉 번 엎어지는 얼음길 아홉 구비, 돌고 돌아 봄이 온다 붓끝에서 하루 한 송이씩 붉게 피어나는 꽃들, 여든 한 송이 홍매가 종이에 채워지면, 얼음사슬 끊어지리라 강의 심장을 동여맨 얼음사슬 뚝뚝 끊어지리라 강이 풀리리라 배가 나루에 닿으리라 수만의 꽃의 병사들 이끌고 우뚝, 매화나무 도착하리라 가시투성이 열두 폭 꽃병풍 펴리라 절하며 맞으라 봄이 활짝 역병처럼 창궐하리라 — 시집 《 사슴목발애인》(산지니)
<시작노트>
겨울을 견디는 풍류가 그지없이 아름답다. 구구소한도는 매화그림이다. 겨울 속의 봄 그림이다. 동지부터 구구 팔십일이 지나면 봄이 온다는 믿음의 그림이다. 동짓날 먹을 갈아 여든한 송이 매화를 그리고 날마다 한 송이 씩 칠해나간다. 한 번에 다 그리는 것이 아니라, 하루 한 송이 씩 봄을 채색 해나간다. 꽃을 생각하며 시작하는 매일 매일이 겨울 속의 봄이다. 그 사이 가장 춥다는 소한, 대한 지나고 입춘이 온다. 봄은 겨울 속에도 날마다 한 송이 씩 오고 있다. 그림은 의도적으로 완성이 지연된다. 그림이 완성되기를 지연시키는 것은 봄을 기다리는 일이다. 가장 긴 어둠의 날을 천천히 환한 빛의 날로 바꾸는 일이다. 구구소한도를 생각하면 하루에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무언가를 하면 팔십일일 정도가 되면 성과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든다. 겨울이 지나가네. 봄이 온다네. 겨울이 지나가네. 꽃이 핀다네. 작사작곡 제멋대로인 노래를 흥얼거리며 한참을 멈추어 서 있다. 향기에 끌려 다가간 매화나무 아래. 이 향기 앞에서, 그대, 그리운 이여. 우리 사랑이 캄캄 막막 어두워도 한 발짝 씩 다가가면 마침내 활짝 꽃 피는 날에 닿을 것을 믿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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