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란 시인의 양면일기 (7)시간의 피륙, 모시

최정란 승인 2019.08.08 16:46 | 최종 수정 2019.08.08 17:09 의견 0
ⓒ최정란

1.
서랍에서 모시 한 필이 나왔다. 한산모시 한 필, 올이 고운 세모시다. 까슬까슬하며 보드랍다. 모시필 두루마리가 풀리며, 거실 바닥에 세모시 필이 길게 펼쳐진다. 알라딘의 하늘을 나는 마법카펫 같다. 올라타! 마법에 걸린 듯 나는 한산모시 필에 올라탄다. 마법의 모시카펫이다. 모시카펫은 엄마 아버지가 살아있던 시절로 나를 태워간다. 씨실과 날실로 엮인 시간의 하늘을 거슬러간다. 모시 필이 타임머신이다.

2.
중학교 가정시간이다. 자수준비물이 필요하다. 수예점에서 파는 재료는 모두가 똑 같다. 지루하다. 엄마의 장롱을 뒤진다. 내 눈에 띈 하얀 모시 한 필, 재료로 안성맞춤이다. 간 크게 가위를 들고 길게 싹둑 잘라 낸다. 한 마쯤 되려나. '한 자만 모자라도 치마저고리 한 벌이 안 나오는데...' 저녁에 돌아오신 엄마는 모시필의 잘린 올을 만지작거리며 아쉬워하신다. 엄마는 왜 나를 혼내지 않을까. 몇 년을 별러서 한산모시 한 필 마련하셨다는데. 그해 여름 엄마는 새 옷 못해 입고, 나는 어른이 되면 새 모시치마저고리 지어드리겠다고 약속한다. 그 약속 결국 못 지켰다. 엄마 돌아가신 지 이십년도 더 지나 눈물도 말랐는데, 모시만 보면 엄마생각 난다. 해바라기를 수놓은 모시조각은 오랫동안 따라다니더니 이제 보이지 않는다.

3.
더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흰 모시한복을 입은 아버지가 흰 구두를 신고 마당을 나선다. 뒷모습이다. 키만 조금 더 컸으면 네 아버지만한 인물도 없는데, 모시옷을 입고 대문 밖으로 나가는 아버지 뒤통수를 내다보며 하던 엄마 목소리가 들린다. 흉이야? 칭찬이야? 엄마는 대답 없이 웃기만 한다.

엄마 돌아가신 후, 여름이 왔다. 아버지는 두어 번 세탁소에서 모시바지저고리를 세탁해 입으셨다. 그러나 곧 그만 두셨다. 엄마가 해드리던 모시옷의 상태를 세탁소에서는 맞춰주지 못했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 그 모시옷 다 어디로 갔을까.

모시옷은 손이 많이 간다. 보관부터 손질까지 모두 번거로웠다. 모시옷은 물에 담궈서 풀을 빼서 보관한다. 풀먹인 채로 보관하면 벌레가 생기고, 옷이 누렇게 변색된다. 거기다 찬바람이 불면 풀 먹인 모시올이 꺾이기 때문이다. 잘 재워야 해. 엄마는 모시옷 보관을 재운다고 했다. 초여름이 오면 겨우내 자고 있던 모시옷의 잠을 깨우는 작업이 시작된다.

아버지의 모시 바지저고리를 꺼내며 엄마의 여름이 시작된다. 모시옷 손질은 풀 먹이기가 기본이었다. 엄마는 흰 밥을 한 줌 물에 풀었다. 물에 한 시간 쯤 불리면 밥이 부드러워진다. 부드러운 밥을 한참을 주무르면 뽀얀 밥물이 나온다. 그 물을 고운 체에 받친다. 그리고 적당량의 찬 물을 섞어 농도를 맞춘다. 밥풀은 농도 조절이 중요하다. 너무 묽지도 되지도 않아야 한다. 너무 묽으면 옷이 금방 후줄근해지고, 너무 되면 옷이 칼날 같이 뻣뻣해져서 살에 스쳐 상처를 낸다. 후줄근하지도 뻣뻣하지도 않으면서 시원하고 태가 나는 농도는 따로 있었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상태를 만드는 풀물의 농도는 엄마의 경험만이 알 수 있었다.

엄마 왜 풀을 먹여? 귀찮게. 풀을 먹여야 빳빳하고 시원해. 옷이 몸에 안 달라붙고 옷 사이로 바람이 살살 불지. 풀을 먹이면 빨래가 쉬워. 땀과 때가 풀에 묻거든. 물에 담궈서 조물조물 하면 때가 쏙 빠져. 나는 손으로 풀물 속의 옷을 조물조물 만져본다. 미끈미끈한 풀물아래 까칠함이 숨죽은 보들보들한 섬유질이 느껴진다. 풀죽는다는 말은 기죽는다는 말이다. 옷에 풀이 죽으면 마음에 기도 같이 가라앉는 것일까. 풀죽지 않아야 사는 것일까. 여름옷도 사람도. 어린 나는 모르는게 많다.

엄마가 풀물에 옷을 주물러서 빨래줄에 건다. 옷이 반쯤 꾸덕꾸덕 마르면 걷는다. 씨실과 날실의 올을 바로잡아가며 모양을 바로 잡는다. 그리고 모시적삼 소매와 모시바지 가랑이를 착착 가지런히 접는다. 모시조끼 단추에 붙은 풀물을 꼼꼼히 닦아 낸다. 깨끗한 이불보 위에 옷을 겹쳐놓고 그 위에 이불보 자락을 덮는다. 그러면 나는 그 위에 달랑 올라선다. 꼭꼭 밟아. 어린 나는 옷의 느낌을 발바닥으로 느끼며 내 무게를 옷 위에 내려놓는다. 내 발 밑에서 옷은 모양이 잡히고, 풀물 속에서 부풀었던 모시올이 차분하게 갈아앉았다.

그리고 나서 엄마는 다듬잇돌 위에 이불보에 싸인 옷을 올려놓는다. 다듬이질은 다리미질 대신이었다. 세월이 조금 더 흐른 후에는 다리미질로 마무리를 했다. 밥풀 먹여 다듬이질 한 흰 모시옷에서는 반짝반짝 윤기가 났다. 밥에도 빛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았다. 빳빳하게 잘 다려진 모시조끼 모시적삼 모시바지 일습을 옷걸이에 걸어두면 집이 훤했다. 없던 바람이 어디선가 불어왔다. 평면의 옷에서 입체의 시간이 살아난다.

ⓒ최정란

4.
엄마도 가끔 모시치마저고리를 입는다. 젊은 엄마는 변변한 양복 외출복이 없다. 늘 바쁜 일에 치어 통치마와 몸빼 차림일 때가 많다. 옥색 모시치마에 흰 모시저고리가 엄마의 단벌 여름 외출복이다. 외가에 가거나 계모임과 잔치에 가실 때 모시치마저고리가 참 잘 어울린다. 모시 옷 입은 엄마는 젊고 예쁘다. 나도 따라갈래. 엄마 손 잡고 나서면 참 좋다. 엄마가 모시 치마저고리를 입으면 좋은 날이다. 언제 엄마 손을 놓았을까. 허전하기도 해라.

5.
옷들이 흔해 빠져서 옷장 마다 옷들이 넘쳐나는 시대다. 시장에도 백화점에도 홈쇼핑에도 너무 많은 옷들로 홍수다. 고르고 카드로 결재하면 끝. 즉시 입을 수 있다. 밭에서 모시의 원재료가 되는 마를 기르고 잘라서 껍질을 벗기고, 직접 실을 잣고 베를 짜서 옷을 만들고 입히는 전 과정을 직접 다 하는 것은 상상도 하기 어렵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동일한 수공업은 아득하다. 그 시대로부터 너무 멀리 왔다. 의생활이 지금처럼 편리해진 것은 채 몇 십 년이 되지 않았다. 옷은 흔해 빠졌지만 제대로 품격을 갖춘 옷은 드물다. 스타일 좋은 옷들이 빠르게 유통되고 빠르게 버려진다. 이제 옷은 소비의 대상일 뿐이다. 관리가 번거롭고 어려운 옷들보다는 관리하가 편리하고 가성비 좋은 옷이 사랑 받는다.

엄마가 직접 모시옷을 손질하던 그 번거로움과 불편함에서 느껴지던 아이러니한 기쁨은 무엇이었을까. 어쩔 수 없었던 그 불편에서 자부심까지 느껴졌으니, 엄마에게 편리만이 미덕이 아니었던 것일까. 모시옷을 손질하는 그 불편하고 번거로운 과정이 그리운 풍경이 될 줄이야.

6.
나도 여름이면 이따금 엄마처럼 모시치마저고리를 입는다. 쪽물 들인 감색 모시치마와 흰 모시저고리이다. 생각난 김에 모시저고리를 물에 담근다. 여름 다 가기 전에 한 번 입으려고. 물에 들어간 모시 저고리 한 벌이 한 줌이 채 안 된다. 바싹 말랐을 때 빳빳한 모시는 물을 먹으면 보들보들하다. 풀이 물에 녹아 미끈미끈하다. 놀이처럼 한참을 조물락거린다. 풀 먹이고 다리미질해야하는데 엄두가 나지 않는다. 모시옷은 엄마처럼 부지런한 사람이 입는 옷이다. 게으른 나는 손질이 감당 안 된다. 엄마는 나더러 잠자리 날개같이 고운 옷 입으라셨지. 인생의 고운 날은 빨리 지나간다고.

치마저고리를 입으면 청바지를 입거나 민소매 원피스를 입을 때와 몸가짐과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치마저고리가 어울린다는 말을 듣는다. 숨어있는 품격이? 철지난 구닥다리 패션 감각이? 아무래도 후자에 가까운가.

어느 쪽이든 모시의 날실과 씨실에는 다른 옷과 차별되는 무엇이 있다. 모시치마저고리를 입을 때 나는 엄마의 시간을 입는다. 잃어버린 시간을 돌려받는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은 조개껍질 모양의 과자 마들렌과 홍차 한 잔에서 돌아오지만, 나의 잃어버린 시간은 모시치마저고리에서 돌아온다. 아마도 무더운 여름이 좋은 것은 모시에 대한 기억 덕분인지 모른다. 아주 작은 추억 하나가 괴로운 날들을 견디는 큰 힘이 된다. 내 무의식에 저장된 모시올은 실제보다 더 촘촘하고 반짝거리는 지도 모른다.

7.
모시필을 감아 다시 서랍에 넣는다. 마법의 카펫이 사라진다. 타임머신의 전원이 꺼진다. 이 모시로 무엇을 할까. 아직은 모르겠다. 당분간 더 재워야겠다. 기다리기로 한다. 때가 되면 깨어나 무언가 되겠다고 모시가 말할 때까지. 가끔 생각한다. 내가 하는 짓들이 멀쩡한 모시 한 필 뭉텅 자르는 짓 아닌지. 서랍 속을 굴러다니다 없어질 꽃, 수놓는답시고, 제대로 된 옷 한 벌 지을 인생의 피륙을 동강내는 것 아닌지. 그래서 때 아닌 다 늦은 가을, 무릎 아래 간신히 오는 시(詩)라는 몽당치마 지어 입고 발등과 발목을 드러낸 채, 이도 저도 못한 채, 부끄러움과 추위에 떨게 되는 것 아닌지.

최정란

◇최정란 시인은 

▷경북상주 출생

▷2003 <국제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장미키스> <사슴목발애인> <입술거울> <여우장갑>

▷제7회 시산맥작품상

▷부산작가회의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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