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여지, 가파도
얼떨결에 즉흥적으로 내린 결정이다. 굳이 이유라면 모슬포 하늘은 맑고 바다는 푸르고 바람은 달았다. 꼭 어디를 가자고 나온 여행이 아니므로 가는 곳 어디가 목적지여도 좋았다.
성수기 붐비는 승객들의 질서 있는 줄서기를 위해 마련된 미로는 비어있다. 줄이 줄어들기를 줄 서서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줄 아닌 줄이 창구를 향해간다. 매표 창구 위 배 시간표는 점심을 먹고 와서 배를 타면 마침맞은 탑승시간을 준비해두고 있다. 이 한산함에 편승하지 않으면 붐비는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후회할 지도 모른다. 계획 없는 우연도 준비된 운명의 일부일 지 모른다.
섬에서 또 다른 섬으로. 섬 하나가 멀어지고 섬 하나가 가까워지는 짧은 항해. 파도치는 세상의 섬으로 살다가 이따금 모여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저마다 묻혀온 슬픔이나 외로움의 향기를 나누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항해.
대양에서 밀려오는 파도가 사정없이 배를 흔들어댄다. 사람들이 연신 비명을 질러댄다. 거대한 파도의 이마가 배의 옆구리에 와서 쿵쿵 부딪는다.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되는 동시대의 대참사.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순간 딸이 몸을 기댄다. 딸의 어깨와 팔의 온기가 함께라는 실감으로 전해온다. 괜찮아. 괜찮아. 그런데 토할 것 같아.
몇 번의 시도 끝에 배가 접안에 성공한다. 바닷물 흥건한 갑판이 미끄럽다. 파도에 놀란 얼굴로 돌아나갈 것을 걱정하며 상륙한다. 보이지 않는 파도가 이따금 흔들어댔는지 삶의 멀미에 자주 울렁거렸다. 바닥까지 토해야 하는 날들도 있었다.
지난 태풍에 꽃들이 다 죽어버려서 예정된 꽃축제가 모두 취소되었습니다. 플래카드가 반긴다. 예정된 멋진 일이 취소된 날도 있다. 피기 직전의 꽃봉오리가 큰 바람에 날아간 꿈도 있다. 축제를 기대했으나 사건이 닥치기도 했다.
선착장 방파제를 따라 늘어선 색색의 바람개비들이 날개가 보이지 않도록 돈다. 저렇게 맹렬히 돌면 섬이 들려올라갈 것 같다. 헬리콥터 몸통을 들어올리는 프로펠러처럼 거뜬히 섬 하나쯤 들어올릴 것 같은 거대한 바람의 손이 이까짓 것 이까짓 것 가볍게 바람개비를 돌리고 있다.
조만간 거대한 가오리가 하늘 위로 떠올라 제가 빠져나온 빈 구멍을 뒤로 하고 먼 바다를 향해 날아갈 지도 모른다. 그 전에 높이 올라 평생 바라보기만 하던 한라산 위를 한 바퀴 빙 둘러보고 그림자 하나 백록담 물 위에 투명한 발자국처럼 찍을 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섬을 탈출한 섬인 줄 모르고 드론을 띄운 줄 오해하겠지만. 섬이 빠져나온 자리에 지구의 중심으로 향하는 구멍이 뚫리고 바다는 구멍을 메우려 미친 듯 쏟아져 내려가겠지만 .
함께 마그마로 들끓었으나 바다 위로 솟아나 형체가 갖춰진 이래 떨어져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영원한 그리움은 닿을 듯 닿을 듯 닿지 않는 거리를 두 섬 사이에 두었다.
테트라포드가 감싼 방파제에 낚시꾼들이 몇 실루엣으로 보인다. 기다림은 삶이었으나 끝내 익숙해지지 않았고, 기다리는 것은 끝내 오지 않았다. 무수히 많은 파도의 입질을 대어의 입질로 오해했으나, 바다조차 아니었던, 내가 지은 욕망이 내 목에 걸린 미늘이어서 숨 막히는 순간도 있었을까.
노출콘크리트로 지어진 터미널 건물이 건너섬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서있고, 그 앞에 자전거 대여소, 섬지도 입간판이 서 있다. 집들 사잇길로 걸어 들어간다.
봄날 청보리밭이던 돌담 밭은 거뭇거뭇 마른 식물의 잔해로 덮여있다. 코스모스와 해바라기 줄기들로 짐작된다. 용케 바람을 피한 키작은 해바라기가 두엇 눈에 띌 뿐. 폐허. 꺾이고 잘린 꽃들은 어느 난바다에서 산화했겠지만, 불로 털을 그을린 짐승처럼 남은 식물의 잎과 밑 대궁은 거뭇거뭇 타들어간다. 바람을 타고 뿌려진 바닷물의 소금기가 식물의 물관을 말려 버리기도 했을까. 소금이 불의 성질을 가졌을까.
닥친 불행 앞에서 순식간에 나이보다 일찍 늙어버린 노부인인 듯, 늦가을을 앞당겨 놓은 듯 한 쓸쓸한 들판이 돌담길 옆으로 펼쳐진다.
그 아래 바람에 흔들리던 뿌리가 다시 정신을 추스려 초록의 기운을 보강하려 애쓰고 있는지 꽃밭이어야 할 곳은 꽃 모가지가 없는 풀밭이다. 꽃의 머리들 사라지고 몸통만 남은 꽃식물들은 다른 꽃봉오리를 제 몸 안에서 찾아내려 애쓰다 절망하기도 했으리라. 마르고 사라지는 것 밖에 남지 않은 운명을 바람이 대신 울어주기도 하리라. 병 주고 약 주고.
원래 이 밭들은 보리농사 다음에 고구마처럼 납작하게 바닥에 붙어 땅속 덩이줄기를 키우는 것이 더 어울렸을까. 중간 중간 오는 큰 태풍의 계절 뻔히 알면서도 거대한 꽃밭을 계획한 사람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꽃들이 쓸려나갔다. 축제 취소 플래카드 아니었으면, 원래 이곳이 폭풍의 언덕 황무지인 줄 알겠다. 혹은 염소가 풀뜯는 바람의 평원이라 부를 만하다.
마당이며 골목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외부에 물건들이 없다. 어지간한 물건은 큰바람에 날아갈테니 밖에 내놓을 수 없을 것이다. 바람 불면 날아가는 물건은 위험하기도 할 터이다.
지붕이 나지막하다. 밭담으로 둘러싸인 무덤 봉분도 나지막하다. 큰바람 앞에서는 삶만이 아니라 죽음도 납작 엎드려야 하는 것이 바람의 제국의 법이다.
해발고도가 수면 가까이 낮고 전체적으로 평평하다. 해발 25미터. 이 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전망대 위에 서니 풍력발전기 너머 마라도가 보인다. 파도 속 외로운 섬 같은 삶에도 더 큰 파도를 굳굳히 견디는 친구가 있으리라. 그 너머 망망대해. 눈이 시리다.
세상을 전망하는데 굳이 까마득 높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몸을 낮추면 그래서 납작 엎드린 낮은 평원이 되면, 높다 할 수 없는 언덕도 시야가 막히지 않고 넓은 세상을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일조권도 방해받지 않고 바람도 속속들이 불어들어 어느 구석 습하지도 어둡지도 않으리라.
남쪽 바다를 향해 난 마을대로를 끼고 초등학교, 보건진료소, 보리방앗간, 해물짬뽕집이 있다. 그쯤에서 돌아선다. 다음에 올 때 볼 여지를 남겨 두기로 한다. 작은 섬이지만 구석구석 내가 모르는 여지들이 남아 있어 나는 영원히 이 섬을 모르리라. 여지라는 시가 찾아온다. 틈이나 사이. 남은 공간. 그 틈이 숨구멍이다.
나머지 골목을 빠져나오자 구름에 덮힌 한라산이 전면에 가득 찬다. 사람 떠난 지 얼마나 되었는지 빈 집 마당에는 허리 높이로 풀이 자랐다.
몸을 가려줄 벽 하나 없는 허허벌판, 사방팔방의 바다가 섬으로 몰려오는지, 꽃들이 쓸려가고난 폐허 위로 바람이 미치도록 분다.
머리를 묶은 고무줄이 끊어졌다. 모자도 스카프도 없는데. 금세 머리가 미친년 산발이다. 쑥대머리 귀신 형용. 옥에 갇힌 춘향이 꼴이다. 스스로 지은 감옥에 갇힐지언정, 삶에 순순히 수청들고 싶지 않은 고집 센 영혼이 깃든 가죽부대에 날개를 달아주고 싶은 것인지, 바람 앞에 날개로 착각한 것인지. 블라우스가 팽팽하게 부푼다. 날아갈 것 같다.
심호흡을 한다. 깊이 대양의 바람을 빨아들인다. 온 몸의 모든 구멍이 숨을 쉰다.
내 안에 어떤 피기를 거부하는 꽃들이 숨을 막고 있어, 이 폐허에서 이토록 뻥 뚫리도록 시원한 것인가. 내 안의 황무지를 사방팔방 대양의 바람 앞에 펼쳐보이는 섬에서, 삶의 가파른 삼각파도 하나를 넘어선다.
◇최정란 시인은
▷경북상주 출생
▷2003 <국제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장미키스> <사슴목발애인> <입술거울> <여우장갑>
▷제7회 시산맥작품상
▷부산작가회의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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