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란 시인, 제5시집 《독거소녀 삐삐》 ... '명랑과 우울'의 시적 서정

조송현 기자 승인 2022.05.19 10:27 | 최종 수정 2022.05.21 10:34 의견 0

2019년 최계락 문학상을 수상한 최정란 시인이 제5시집 《독거소녀 삐삐》를 출간했다.

이 시집은 명랑하거나 우울하거나 혹은 그 사이 서정의 시편 68편을 담았다.

표제시를 보자.

       

최정란 제5시집 표지

 

 독거소녀 삐삐

 

 늦은 밤 골목을 돌며 논다 노인이 리어카를 끌며 논다
불 꺼진 빈 상자를 펼치며 납작납작 논다 비탈진 오르막
을 밀며 비틀비틀 논다 노세 노세 노동요를 노새처럼 끌
며 논다

 노래하는 새들이 노인을 놀리며 논다 밥이 노인을 차
리며 논다 노는 입이 거미줄을 치며 논다 이 빠진 노래가
노인을 읊조리며 논다 흘러간 앨범 속 파노라마가 노인
을 펼치며 논다 슬픈 일 기쁜 일 아픈 일이 노인을 논다

 시간과 잘 노는 사람, 시간을 잘 놀려야 하는 사람, 지
나간 시간을 천천히 되새김질하는 사람, 시간이 날 때마
다 병원놀이를 하는 사람, 병과 정들어 병원놀이도 마음
대로 못하는 사람, 노을이 깊어 놀 일이 바쁜 사람

 노인이 가장 잘 하는 놀이 기다리는 놀이, 기약 없이 하
염없이 바쁜 놀이, 한가해서 더 바쁜 놀이, 노인이 논다
오지 않는 뼈와 살을 기다리며 논다 미처 오지 않은 먼
바깥을 기다리며 논다

 

문학평론가 오민석(단국대) 교수의 해설 한 토막을 들어보자.

최정란의 시는 소녀-언어와 슬픔-언어가 겹치는 곳에서 태어나는 주름들이. 그것은 다양한 형식과 콘텐츠로 이루어져 있지만, 겹치고 겹쳐 다름 아닌 '최정란의 세계'로 종합된다.

이 시집엔 깔깔대며 세계의 지붕에서 미끄럼 치는 명랑, 발랄한 소녀들의 언어가 있고, 그것들의 배후에서 사선射線으로 내리는 비처럼 우울한 슬픔의 언어가 있다.

최정란의 시는 이렇게 '우울과 명랑이 뒤섞'여 있다. '명랑'은 그녀의 시를 경쾌하게 만들고, '우울'은 그녀의 시를 깊게 만든다.

 

'시인의 말'도 들어보자.

검은 솥이 흰 두부를 끓이고 있다 두부
는 몸 전체가 마음, 으깨지기 쉽고 모서
리가 고즈넉한 고요, 저 말고는 아무도
가두지 않는 작은 상자, 역병과 전쟁의
반대말, 평화와 일상의 동의어, 칼로 자
른 듯 분명하지만 속속들이 부드러운 미
래, 희고 슴슴한 질문으로 가득하다 흰
두부가 검은 솥을 끓이고 있다

 

최정란 시인

최정란 시인은 2003년 국제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첫 시집 《장미키스》를 시작으로 《사슴목발애인》 《입술거울》 《여우장갑》을 냈다. 2019년 최계락 문학상을 수상했다. 

<pinepines@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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