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가 있는 인저리타임] 봄날은 간다 / 최정란

최정란 승인 2021.03.26 17:47 | 최종 수정 2021.03.28 00:32 의견 0

봄날은 간다 / 최정란

꽃 잡아라 꽃, 아직 얼마 못 갔을 것이다

산채를 내놓아라
일제히 쳐들어온 연두 화적떼에 쫓겨
얼마나 서둘렀는지
산골짜기마다
떨어뜨리고 간 꽃신 꽃노리개 꽃반지
낭자하다

밤새 북쪽으로 북쪽으로 길을 잡아
소문들 앞질러가는 지름길마다
잡힐 듯 잡힐 듯 만개했을까
모래를 흩날리며 방금 떠난 흔적들 파다한데

아니, 뚜벅거리는 낙타버스에서 막춤을 추는
저 철없는 얼굴은
술값 떼먹고 도망간 그 꽃 아닌가
주는 대로 한 잔씩 받아 마셨는지
볼그족족한 두 볼

남풍에 취한 흔적 역력하다

숨는다고
그 얼굴 차마 못 알아보겠는가
그 얼굴 보자고 한 해 기다렸으니
그 얼굴 다음 해 다시 볼 기약 없으니

설마 술값 받으러 여기까지 따라왔겠는가
고운 얼굴 한 번 더 보자는데
먼지와 모래를 삼키며
꽃의 대상들 틈에 숨어 황무지로 달아나는
매정한 저 꽃, 잡아라

- 시집 《장미키스》 중 -

지리산의 봄 [픽사베이]
지리산의 봄 [픽사베이]

<시작 노트>

어느 해인가 여러 시인들이 불러 녹음한 '봄날은 간다'를 연달아 들었다.
같은 봄날도 시인마다 색과 맛과 향이 달랐다.
언젠가 좋은 사람들과 '봄날은 간다' 녹음할 날 있기를.

최정란 시인

◇최정란 시인은

▷2003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사슴목밭애인》 《여우장갑》 《입술거울》 《장미키스》

▷2016년 제7회 시산맥작품상

▷2017년 세종도서 문학나눔

▷2019 최계락문학상

▷2020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창작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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