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가 있는 인저리타임] 황태해장국 / 최정란
최정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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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0 14:05 | 최종 수정 2019.02.10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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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해장국 / 최정란
내린천 물소리 기웃거리는 산골 마을에
부엌 딸린 외딴 방 하나 얻을까
밤새워 얼음장 아래 흐르는 물소리에
어둠이 하얗게 뼈를 씻고 난 아침
흰 눈 위에 흩어진 검정콩처럼 드문드문
까치소리에 그리운 사람 기다려도 좋을까
갑작스런 폭설에 길이 막힌
먼 마을 손님이 예고 없이 찾아들면
오래 못 본 오빠인 듯 아랫목에 자리 내주고
황태 해장국 뜨겁게 끓여내어
세상의 추위에 얼어붙은 속 풀어줄까
꽁꽁 얼어붙은 마음이
가마솥 옆 조청처럼 진득하게 녹으면
큰누나처럼 고모처럼 이모처럼
소설책 한 권으로는 모자랄, 살아온 이야기
밤새워 들어줄까 그래 그래 맞장구 쳐 주고
어떤 대목은 박장대소하고
어떤 대목에서는 눈물도 같이 흘릴까
휘몰이 자진모리 장단 맞춰 흘러온 내린천
맑은 물에 눈썹을 씻은 자작나무 가지에
달그락 달그락 국그릇 씻는 소리가 내걸리고
얼었다 녹았다 다시 얼던 길이 풀리도록
햇살 퍼지기를 기다려
전생에서 내생으로 넘어가는 굽은 길 모퉁이
잘 가시오 잘 가시오
보이지 않을 때 까지 손 흔들어 배웅하고
아궁이 앞으로 돌아와
살아온 날 앙금 걷어낸 찌꺼기
불 속에 밀어 넣어 화르르 태우고
영원히 오지 않을 사람, 걸치고 떠난
낡은 외투 뒷모습처럼 다시 외로워도 좋을까
-----시집 < 여우장갑> 2007
<시작노트>
따뜻한 사람이 되리라. 겨울이 다가오면 결심을 한다. ‘은는이가을를’ 조사 하나에 한 나절 골몰하는 예민한 까탈도 내려놓고 낯가림 심한 까칠도 내려놓고, 이래도 흥 저래도 흥, 다 이해하고 다 받아주는 산골 주막 넉넉한 주모여도 좋겠다. 못 배운 술이야 권커니 잣커니 못 마셔주더라도, 이야기야 얼마든지 잘 들어주지 않겠는가. 해장국이야 시원하게 끓여줄 수 있지 않겠는가. 얼고 녹으며 잘 마른 황태 북북 찢어 맑은 물에 헹구고, 콩나물 한 줌 납족납족 썬 무 한 도막 함께 들기름에 달달 볶아 물 붓고, 들깨가루 풀어 끓이다가, 유정하고 무정한 계란 하나 푼 소울 푸드 soul food 맑게 끓는 아침. 송송 썬 파릇한 움파 한 줌 얹어 김이 나는 뜨거운 황태해장국 한 대접, 세상에서 떨고 온 사람 앞에 올리는 아침. 식기 전에 드시라. 내 오라비 같고 내 아우 같고 내 아들 같은 세상 사람이여. 이 숟가락 받아들고 푹푹 떠서 입천장 데지 않게 훌훌 불어 드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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