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란, '시인의 양면일기' ... (1)두부와 우물

최정란 승인 2019.02.10 23:42 | 최종 수정 2019.07.22 18:30 의견 0

<시인의 양면일기> 연재를 시작합니다.

일상 속 사물과 사건들이 길어올리는 작은 이야기들을 남기고자 합니다. 따뜻하고 슬프고 아프고, 때로는 웃기고 뼈저리고 누추한 이야기, 모두의 이야기 동시에 아무의 이야기도 아닌 이야기.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누군가에게는 한 시대를 살다간 치열하고 간절한 기록. 시간과 공간을 함께 살아온 당신과 나, 우리의 이야기. 내면과 외면 그리고 그 경계를 아우르는 ‘양면일기’. 제목은 미셸 뚜르니에의 ‘외면일기’에서 응용합니다.

두부 한 모를 산다. 크림 아이보리 색, 거친 듯 부드러운 직육면체. 칼을 대고 엄지손가락 한 마디 크기로 깍둑썰기 한다. 구운 김을 두 장 집게손가락 크기로 잘게 잘라 얹고 들기름 한 숟가락과 볶은 통깨를 듬뿍 뿌린다. 간장, 고춧가루, 참기름, 다진 파, 다진 마늘, 깨소금을 섞어 양념장을 만든다. 슴슴하고 고소하고 부드러운 두부, 두부를 먹으며 두부집 생각을 한다.

우리 동네 그 옛날 두부집. 수도도 들어오지 않아 집집마다 두레박으로 우물물을 길어먹던 시절. 골목 안 두부집. 두부공장이 아닌 두부집이라 불리던 집. 두부맛이 좋다고 소문난 그 집으로 일주일에 두세 번 두부 심부름을 가곤 했다.

두부를 만들려면 물이 좋아야 한다. 놀랍게도 우리 동네 두부집 우물은 동네에서 물이 가장 나빴다. 물의 색이 황토가 섞인 듯 불그죽죽했다. 물 위에 기름 같은 것이 떠 있기도 했다. 아마도 우물이 센물 길 지하수가 지나가는 위에 놓여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도 두부집을 한다니 놀랍고, 그 물로 동네에서 제일 맛난 두부를 만드는 것이 이상했다,

비결은 정수기였다. 지금 같이 코디가 와서 필터를 갈아주는 정수기가 아니라, 두부집 아저씨가 직접 만든 정수기는 우물 옆에 놓인 둥글고 커다란 시멘트토관이었다. 그 안에 층층이 큰 자갈, 작은 자갈, 모래, 숯, 솔잎, 황토 등의 필터를 쌓아 만들었다. 한 두레박 한 두레박 퍼올린 물을 정수기에 붓는 것으로 정수가 시작되었다. 여러 층 반복된 여과층을 지나 물통으로 떨어져 내리는 물은 맑았다. 붉은 철분기가 싹 가시고 기름기도 말끔히 가셨다. 시멘트토관을 통과한 물은 달았다. 센물이 단물이 된 것이다.

농촌 면소재지에서 추수가 끝나기 전에 현금을 만지는 집들은 장사하는 집들뿐이었다. 두부집은 현금이 유통되는 집 가운데 하나였다. 많은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으로 보내질 때, 두부집은 아들을 대학에 보냈다.

무언가 잘 안 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무언가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주어진 조건이 나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두부집을 생각한다. 굽은 골목 안, 마당이라고는 손바닥만큼 좁은 두부집. 나쁜 우물과 시멘트토관 정수기가 있던 집. 가장 나쁜 물로 가장 좋은 두부를 만들던 집.

주어진 조건이 나쁘다는 것은 부족하고 모자란 것이 아니라 아직 여과가 안 된 것이다. 걸러내면 좋아진다. 내가 나에게 맞는 정수기를 만들고 알맞은 필터를 층층이 채워 넣으면 나의 조건도 맑고 단 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물로 두부도 만들고 단술도 만들고 밥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나쁜 조건은 여과가 되지 않은 좋은 조건의 지하수 물길이다. 나쁜 조건은 세공이 되지 않은 보석의 원석이다.

삶에서 불순물이라 할 수 있는 나쁜 기억들이 들어올 때도 머릿속에 정수기 하나를 만든다. 한 층 한 층을 내려갈 때마다 나쁜 불순물들이 걸러져 나간다. 화도 불쾌감도 우울도 여과된다. 어느 순간 맑은 물이 똑똑 떨어진다. 맑은 슬픔이 고인다. 이 슬픔이 메마른 나를 기르는 물이다.

내게 우물 하나가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삶이라는 우물을 가진다. 내가 살아온 삶이라는 우물은 썩 좋다고 하기 어려운 조건의 우물이다. 그 물을 퍼올려 글을 쓴다. 그래도 괜찮다. 내게는 언제라도 여과지를 교체할 수 있는 정수기가 있다. 층층이 필터를 채운다. 여행, 책, 영화, 봉사, 음악, 그림, 산책, 거리, 시장 ... 내가 경험하는 많은 것들은 좋지 않은 원수를 걸러주는 여과지 역할을 한다.

이 필터도 잘못 사용하면 과도한 욕망에 감염되어 오히려 흐려질 수도 있음을 명심한다. 자주 정수기의 필터를 바꾼다. 바꿀 수 없는 것은 시멘트 토관이라고 생각하기로 하자. 그 모든 필터들을 감싸고 있는 둥글고 품이 너른 묵묵한 공간. 청소한다.

좋은 물이 올라오는 우물을 가진 집은 그 물을 적극적으로 정수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정수하면 더 좋은 물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상태에서 안주한다. 주어진 조건을 개선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발전이 없다. 고만고만한 상태에 머물기 쉽다. 물론 예외도 있다. 출발이 다른 것을 인정하기로 한다.

나쁜 우물을 가진 집은 좋은 물을 가지기 위해서 여러 궁리를 한다. 정수기를 만든다. 시멘트토관에 어떤 물질을 넣어야 가장 효과적으로 불순물을 걸러낼 수 있는지 연구한다. 물의 성질을 고민하고 물질들의 성질을 탐구한다. 일차적인 결과로서 가장 나쁜 물은 당연히 매우 좋은 물로 변한다. 두부라는 생산물이 탄생한다. 그 과정에서 물만 좋아지는 것이 아니다.

악조건을 개선해본 경험 하나는 다른 경험에 전이된다. 궁리하는 법을 알게 된다. 물만 아니라 다른 나쁜 조건들도 개선하기 위한 방법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나쁜 조건은 좋은 결과를 위한 방향을 가지게 된다. 그 방향에서 삶을 잘 만들어가는 궁리하는 자세가 탄생한다.

내가 쓰는 글은 어쩌면 두부일 것이다. 삶에서 겪게 되는 수많은 재료들이 나라는 정수기를 통과한다. 여러 필터층을 거치는 동안 명징해진 생각들이 모인다, 정수기 하나를 거친다. 말도 안 되는 문장들이 모인 초고가 완성된다. 다시 이 초고를 다른 정수기에 집어넣는다. 필터의 여과층을 거치며 낱말을 고르고 문장을 고른다. 퇴고라고 하자. 정수기 둘을 거친다. 끓이고, 짜고, 거르고, 누르고, 틀에 채우고, 기다리고, 자른다. 이 역시 여러 번의 퇴고라고 하자.

이윽고 글이라는 형태가 갖추어진다. 조심스레 식탁에 올린다. 슴슴하고 아주 흰 것은 아니지만 흰 색에 가까운 거친 손두부 한 모의 글.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양념장을 기호대로 끼얹으면 그럭저럭 먹을 만 한.

최정란 시인

◇최정란 시인은

 

▷경북 상주 출생
▷계명대 영어영문학과 계명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3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사슴목발애인< 입술거울> <여우장갑> <장미키스>
▷제7회 시산맥작품상, 2017년 세종도서 문학나눔

cjr1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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