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란, 시인의 양면일기 (10)백 년 동안의 고독

최정란 승인 2019.10.07 17:27 | 최종 수정 2019.10.07 17:43 의견 0
콜롬비아 자매들과 필자(왼쪽 세 번째).

백 년 동안의 고독

통도사 소풍에서 이국 미인들 틈에 앉았다. 콜롬비아 출신 세 여성은 자매간이다. 한 명은 현대에서 프로젝트 작업 중인 노르웨이 출신 남편 따라 울산에 사는 새댁이다. 두 명은 자매를 만날 겸 휴가차 한 주일 예정으로 한국 방문 중이다.

콜롬비아 커피 티비광고에 나오는 콜롬비아 미인들을 직접 만나 반갑다고 했다. 까르르 웃는 소리가 발랄하다. 마르케스를 언급하자 영혼이라도 빼줄 듯 기뻐한다. 지구 반대편 낯선 나라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산사에서 자기 나라의 큰 자랑거리인 작가가 언급될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콜롬비아는 먼 나라. 노벨상을 수상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아니었다면, 과문한 나는 커피, 마약만 떠올렸을 지도 모른다. 다행히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읽은 기억이 오랫동안 내 머리에 남아 있어, 나에게 콜롬비아는 매력적인 문학의 나라로 각인되어 있다. 문학에 구현된 그들의 삶과 존재의 뿌리는 아득하고 낯설고 아름다웠다. 비현실과 초현실의 상상의 공간이 된 콜롬비아는 내 기억 속에서 여러 상상적 공간과 상상적 인간관계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콜롬비아에 관한 모든 부정적 사실들을 밀어낼 만큼 강한 힘이 마르께스의 문학에 들어 있었다.

문학은 힘이 세다. 읽지 않았더라면 이해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나라를 심지어 동경하고 사랑하기까지 했으니. 심지어 나는 첫 시집 ‘여우장갑’에 실린 ‘백 년 동안의 고독’이라는 제목의 시를 쓰기도 했으니.

머리맡에 자리끼로 떠놓은 달빛이 얼어붙는 밤, 외할머니는 청어비늘에 파랗게 내려앉은 달빛을 하나씩 떼고 있었다. // 동쪽 하늘에 올라온 달이 서쪽으로 일곱 그루 소나무를 지나도록, 했던 이야기 또 하고, 했던 이야기 또 하고, 눈꼬리가 짓무른 외할머니의 그렁그렁한 눈에 똬리를 튼 달빛은 졸린 기색이 없었다. 달빛에 만 메밀묵 한 사발을 먹어도 잠이 오지 않아, 요강을 찾아 마루로 나가면, 달빛이 자박자박 밟고 다닌 황토 마당, 사랑채 지붕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 청명에 떡 한 말 옹기시루에 쪄 올리면 칼로 자른 듯 딱 절반을 베어 먹고, 살구꽃 봉오리 터뜨리는 길일을 받아 한 필 광목 깔아주면 그것을 밟고 천-천-히 외출하셨다가 해질 무렵 온몸에 노을을 감고 돌아오셨다,는 지킴이 구렁이가 백 년 동안 살던 대들보를 떠난 뒤, // 뒷마당 살구나무에 꽃보다 달빛이 더 많이 피던 외할머니 집. // 우물에 내린 두레박을 끌어올리면 물보다 달빛이 더 많았다. 낮에도 하얀 달빛을 머리에 이고 마루 끝에 서서 먼 길을 내다보던 외할머니는 그 많은 달빛을 어떻게 다 견뎠을까. ( 최정란 /‘백 년 동안의 고독’ 전문 『 여우장갑 』 2007)

환상적 리얼리즘의 세계에서 튀어나온 사람들이라 생각하니, 이 여성들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백 년 동안의 고독’과 작품 속 마을 ‘마콘도’를 이야기하니 금방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얼굴들이 되며 진심으로 기뻐한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 이 콜롬비아에서는 더 인기 있고 재미있다고 알려준다.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작가는 누구인가요? 잠시 말문이 막힌다. 질문에 대답하기 쉽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작가가 누구일까. 숙제를 얻는다. 순간 작가들의 삶의 태도와 입장 때문에 작품외적인 이유로 우리 안에서도 평가가 엇갈리는 많은 작가들이 스쳐지나간다. 유명한 작가보다 훌륭한 작가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매우 많아서 한 명만 꼽을 수 없다. 말하고는 현재 젊은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짚어보다가, 아쉬운 대로 한강의 ‘채식주의자’ Vegetarian가 영역되어 있고. 맨부커상 받은 사실을 언급했다. 다행히 울산댁은 영국에서 대학교를 다녀서 맨부커상을 잘 알고 있었다. 꼭 찾아 읽어보겠다고 한다.

우연히 만난 외국인과의 짧은 대화에서 문학이 대화의 콘텐츠가 되었다. 외국에서 보내는 짧은 휴가 중 누군가 우리나라 소설가와 시인의 작품을 기억해서 말해주면 참 기쁘고 자랑스러울 것 같다. 세계에서 빛나는 우리의 다양한 문화 콘텐츠가 있겠지만 아직 한국문학은 세계 시장에서 나아가야할 여지가 많다.

남북한 합해 칠천만 소수가 사용하는 한국어 문학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본다. 우리나라의 위상과 역할이 더 커져서 세계인이 한국어를 배우게 되는 날이 오기 바란다.

그 전까지는 다양한 언어로의 번역은 필수적일 것이다. 아쉽게도 콜롬비아 울산댁은 한국에 2년 살았지만 집 근처 서점에서 한국작가의 영어본 혹은 에스파뇰본 책은 본 적 없다고 했다.

더 많이 더 널리 읽히려면 더 적극적으로 번역해야 할 것이다. 문학이 삶속으로 깊이 들어가든, 삶이 문학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든, 문학이 사랑받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면 우리 문학의 외국어 번역은 금방일 것이다.

프랑스 파리의 어느 가게에 전시된 한국 화장품 광고. 'Korean Beauty'란 단어가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젊은 여성들답게 미(美)에도 관심이 많다. 세 자매는 이구동성으로 한국 여성들 피부가 좋다고 한다. 심지어 나더러 아침에는 무얼 바르느냐. 저녁에는 무슨 크림 바르느냐 묻는다. 나야 초간단화장파, 대답해줄 꺼리가 많지 않다.

한 아가씨는 내 딸과 동갑이다. 나이를 묻더니, 자기 엄마에 비해 내가 젊고 피부가 곱다고 감탄이다. 졸지에 피부미인 되었다. 께 보니따! Que bonita! 아름다운 한국여성의 피부. 나는 파리에서 본 한국 화장품 광고를 말해주었다.

대학교 일학년 때 과별로 단체로 간 범어동 태평양화학 견학이 생각난다. 화장법을 처음 배우던 스무 살. 우리 화장품이 세계적 경쟁력을 가지게 되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누군가 남미 수출 아이템 리스트를 고민 중이라면 화장품을 포함해도 좋으리라. 이미 수출되고 있을 것이라 믿어진다.

어떤 우연한 조우이든 모든 만남은 의미가 있다. 짧은 만남에 책이야기를 할 수 있어 기뻤다. 문학 전공자가 아닌 콜롬비아 사람이 한국에 와서 한국인과 마르께스를 이야기 하듯, 우리도 세계 어디에서나 세계인과 더불어 한국 문학을 읽고 이야기하는 날이 오기 바란다. 훌륭한 우리 작가들의 작품 이야기를 할 수 있기 바란다. 그리고 자기가 재미있게 읽은 책을 소개해줄 수 있기 바란다.

책 안 읽는다는 소식, 동네서점 문닫는 소식은 이미 뉴스거리도 아니다.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책은 안 읽으면서 노벨상은 왜 그리 기다리는지. 외국에서 상이나 받아야 국내에서 냄비 끓듯 와르르 떠들다가 다시 금방 안 읽는 모드로 돌아가는지.

상 타령 하기 전에 우리가 우리 문학을 더 많이 읽는 게 먼저 일 것 이다. 외국인에게 우리 책을 자신 있게 권하자면, 문학 읽기운동이 먼저 일어나고 활성화 되고나서의 일일 것이다. 책읽기에까지 운동을 덧붙여야 하니 궁색하고 누추하다 못해 슬프다.

문학에는 한류드라마, 영화 K~pop, 골프, 화장품이 다 보여줄 수 없는 한국, 문학만이 문자로 그려 보여줄 수 있는 우리 존재의 뿌리와 역사와 삶, 기쁨과 상처. 지금 이곳과 과거 그리고 미래가 있다.

문학에 구현된 그 모든 한국적 특수성이 인간 보편성의 슬픔에 닿을 때, 세계가 우리와 공감하여 울고 웃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세계와 더불어 진정으로 공감하며 울고 웃게 될 것이다.

최정란

◇최정란 시인은 

▷경북상주 출생
▷2003 <국제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장미키스> <사슴목발애인> <입술거울> <여우장갑>
▷제7회 시산맥작품상
▷부산작가회의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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