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란, 시인의 양면일기 (8)백로

최정란 승인 2019.09.16 13:52 | 최종 수정 2019.09.16 14:13 의견 0
칸나(왼쪽)와 풍선덩굴. 사진=최정란

백로

소리가 바뀌었다. 매미소리가 물러가고 풀벌레소리가 싸르륵 싸르륵 어둠 속으로 퍼져나간다. 귀뚜라미. 철썩이. 대지의 뜨거운 기운이 한풀 꺾인 후에 비로소 소리들이 순하게 귀에 닿는다.

기세등등한 소리보다 한풀 꺾인 소리에 마음이 간다. 이기는 소리보다 지는 소리가 애틋하다. 위에 떠오르는 소리보다 밑에 깔리는 소리가 믿음직하다. 내가 옳다는 소리보다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소리가 더 환하게 들린다.

풀에 흰 이슬이 맺히는 때가 왔다. 여름내 짙은 보랏빛 맥문동 꽃은 색이 바래고, 태풍에 떨어진 백일홍 꽃 위에도 이슬이 맺히겠다. 이슬에도 소리가 있으리라. 물방울 안에 스며든 소리 없는 소리. 그 맑고 차가운 한 방울, 물이 맺힐 때 소리도 풀끝에 맺히리라.

사람의 소리에도 형태가 있다. 어떤 소리는 사납고 배고픈 맹수 형상이다. 도망쳐야 할 것 같다. 어떤 소리는 비를 막아주는 우산 형상이다. 그 소리 아래에서 같이 빗길을 걸어도 좋을 것 같다. 어떤 소리는 지붕의 형상이다. 그 목소리가 덮어주는 벽 안에서 한 달 쯤 쉬었다 가고 싶다. 어떤 소리는 밤하늘 조각배 같다. 노를 저어서 다른 별까지 데려다 줄 것 같다. 어떤 목소리는 당장은 차가운 얼음조각 같지만 녹아서 곧 사라질 것 같아, 그 옆에 서 있어주어야 할 것 같다.

절정에 다다라 밤낮없이 폭력으로 불리던 더위는 순해져서 낮에는 따가운 햇볕 몇 시간 흔적으로 남고 밤에는 흔적 없다. 밤의 대기는 이불을 끌어당기게 서늘하다.

태풍 온다고 닫은 창문을 연다. 밤새 들어도 좋겠다. 저 가느다랗고 섬세한 풀벌레 소리, 살갗에 와 닿아 오소소 작은 소름이 되는 소리, 바깥의 큰 소리들이 내는 무신경한 상처에 작은 반창고들을 붙여주는 소리.

춥지도 덥지도 않아 잠도 아까운 시간이다. 깨어있으라는 저 풀벌레소리. 맑고 올올이 선명한 소리, 시간의 다음 마디에 도달했음을 알리는 소리, 재우기보다 오히려 깨우는 소리, 작지만 모서리의 각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소리.

맥문동과 수국(왼쪽)과 족두리꽃. 사진=최정란

인간사의 소음이 아무리 커도 시절인연 만큼이다. 개개인 인간 존재의 가치는 대체불가능이지만, 어떤 용도나 도구로 쓰이는 인간 존재는 늘 대체될 준비가 되어있다. 대체불가능이든 대체가능이든, 인간이 머무르고자 하나 간절히 붙잡고자 하나 시간이 밀어낸다. 매정한 시간 같으니라고.

한 여름 밤낮없이 그토록 간절하고 크게 울던 매미소리가 한낮 잠깐 말고는 대부분 잠잠하다. 나무에서 울음을 모두 퍼내고 난 매미껍질들이 떨어진다. 매미가 붙어 울던 나무들은 이제 잠을 청해도 좋으리라. 그리고 조용히 초록으로 무성하던 잎들은 초록과 이별할 준비를 해야 하리라.

흰 이슬이 맺힌다는 절기, 백로, 멀리 날아갈 준비를 하는 흰 새들을 상상한다. 멀리서 날아올 흰 날개의 고단함을 상상한다. 또 한 철 다른 새들이 찾아와 갈대 사이에 깃들 것이다.

한때는 우리를 슬프게 하는 소리는 낮고 작은 소리인 줄 알았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소리는 크고 높은 소리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계절이 지나간다. 낮고 작은 소리에 마음을 기댄다.

족두리 꽃에도, 풍선덩굴에도, 칸나에도 이슬이 맺히겠다. 순한 소리가 맺히겠다. 풀잎에 맺힌 이슬에 발목을 적시며 걸어도 좋은 새벽이 다가온다.

최정란

◇최정란 시인은 

▷경북상주 출생
▷2003 <국제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장미키스> <사슴목발애인> <입술거울> <여우장갑>
▷제7회 시산맥작품상
▷부산작가회의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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