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가 있는 인저리타임] 풀의 정신 / 김형로

김형로 승인 2019.03.13 20:19 | 최종 수정 2019.03.13 20:32 의견 0

풀의 정신 / 김형로

한갓 발길이 두려워서야 풀이 아니리
밟혀도 풀, 커봤다 풀
헝거리 정신으로 바람결에 쉐도우 복싱을 하고 있는 풀들

이름 모를 풀을 보면 당신은
잡초라고 퉁, 치지만 그것은 당신의 자유
그들에게도 철학이 있다

바랭이는 당신을 위해 방석을 깔고
어디 한 번 밟아보라며 펑퍼짐한 엉덩이를 내민다
밟을수록 좋다고 댓거리한다

질경이는 함부로 
당신 발에 밟히는 순간
긴 혀를 내두르며 말한다
오, 내가 지구를 짊어졌구나

당신은 풀 한둘 뽑을 수 있지만
저 무성한 풀의 정신은 죽일 수 없다
배짱 없이 풀일 수는 없다고
풀풀한 풀의 함수를 사람은 풀 수가 없다

겨울이면 사그라들 것들의 힘이란 어디서 오는 건지
밟혀도 풀, 커봤다 풀인 것들이
나무도 못 되는 것들이
거대한 생각의 씨를 심고 있다

풀의 가문엔 약골이 없다
 

<시작 메모>

봄입니다. 생명의 원천인 풀들이 꿈틀댑니다.

은혜로운 대지는 품고 있던 풀씨들을 차례차례 피워올릴 겁니다.

하늘은 녹없는 사람을 내지 않고, 땅은 이름없는 풀을 기르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뜻없는 존재는 없다는 것이지요.

농사를 짓는 것은 뭇생명을 품어야 하는 것이지만 실제는 그렇지 못합니다. 

잡초라는 이름에는 사람의 필요에 의해 구획되는 폭력의 씨가 잠들어 있습니다.

내 손에 뽑혀간 풀들에게 작은 조사를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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