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가 있는 인저리타임] 미륵을 묻다 / 김형로

김형로 승인 2019.11.30 21:14 | 최종 수정 2019.11.30 21:41 의견 0

미륵을 묻다 / 김형로

이천여 년 전의 방가지똥 씨앗이
스스로 발아가 된 적이 있다고 한다
한해밖에 못 사는 풀이 때를 기다린 것이다

사랑할 만한 세상이 오지 않아
이천 년 동안 눈 감은 태연함이라니
고작 일 년 살자고 이천 년을 깜깜 세상 잠잤다니

어찌 꽃만의 일이랴
우리도 한 천 년쯤 자다가
살고 싶은 세상 왔을 때 눈 뜨면 어떨까

사람이 세상을 가려 올 수 없으니
땅에 엎드린 바랭이들 한 천 년쯤 작정하고
씨앗을 묻었다는 매향埋香의 기록

아, 어느 어진 왕이 천 년 후를 도모했던가

침향이 되면 아름다운 향기로 살라고
백 년도 아닌 천 년을 걸어 나무를 심었단다
그것은 사람이 심은 방가지똥이었다

한 해 지어 한 해 먹던 풀들이
천년 후의 씨를 뿌렸다는,
매향에 관한 몇 줄의 글
읽고 또 읽고

노오란 꽃을 든 미륵이 눈에 어른거렸다 

김형로

 

 

 

 

 

 

 

김형로 시인의 첫 시집 '미륵을 묻다' 표지. 문학평론가 하상일 동의대 교수는 해설에서 "김형로 시인의 시는 성찰적 시선을 통해 현재의 삶이 나아갈 방향을 찾는 서정시의 근본적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시인의 말

작은 새들은 천적을 피해
가시덤불 속으로 몸을 숨긴다
멧새는 찔레 가시 속을 찾아 들어갔을 뿐인데
이렇게 적는 사람이 있다
찔레는 작은 가시 하나 들고 힘없는 것들 편에 섰다고
그런 시를 쓰고 싶다
캄캄한 시의 바다에 등대가 되어준 마경덕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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