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례없는 경기침체에 코로나 발 사회적 거리두기는 차츰 인간 거리두기가 되면서 외로움과 불안, 우울감에 힘들어하는 분들이 늘고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경기를 풀타임 뛰다 지친 선수들에게 인저리타임 동안 코칭스텝이 건네는 시원한 얼음 생수 한 통처럼, 여기 영웅 한 분의 이야기를 통해 힘과 용기 얻으시길 바랍니다!
무더위가 한창이던 7월 말 강서의 한 카페에서 김형배 부산장애인태권도협회 선수위원장을 만났다. 아담한 체구였지만 당당하고 유쾌한 그와의 대화시간은 힐링 그 자체였다.
‘장애를 이겨낸 집념의 태권왕‘이라는 타이틀의 러닝타임 3시간짜리 영화를 한 편 본 듯 그의 스토리에는 확실한 감동과 메세지가 있었고 재미는 덤이었다.
- 위원장님 반갑습니다. 우선 근황이 궁금합니다.
▶더운데 다들 고생이 많으십니다. 부산 장애인태권도협회 활동과 개인 훈련을 하면서 부산 장애인태권도협회 선수위원장으로 선수권익을 보호하는 일을 2020년부터 계속 해오고 있고요, 금년 하반기부터는 부산지체장애인협회 강서구지회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 축하드립니다. 부산지체장애인협회에 대해 알려주시고 간단한 소감도 부탁드려요.
▶지체장애인의 사회인식개선, 사회참여확대, 권익 및 자립을 도모하고 장애인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설립한 단체로, 중앙회를 주축으로 17개 시도협회 그리고 산하 229개 시·군·구지회가 있는데 이번에 제가 부산 강서구지회 초대회장이 되는 겁니다. 군 복무 중 사고로 다리를 잃어 삶을 포기하고 싶었던 제가 장애인을 위한 봉사를 하게 되다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 군 복무 중 다리를 잃으셨다고 했는데 그 얘기를 들려주시겠어요?
▶1983년 6월 철원 최전방 DMZ 수색부대에서 작전수행 중이던 소속 병장이 발목지뢰를 밟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그 주인공이 바로 저였어요. 전역 한 달 전이었죠. 사실 지뢰라는 걸 처음 밟다 보니 순간 북한군과 교전이 일어난 줄 알았지 뭡니까. 동기가 달려와서 피 흘리는 제 다리를 묶어 주는 걸 보고서야 사태를 파악했어요. 순간 ‘아 끝장이구나’ 싶었는데 그 와중에도 장남을 군에 보내고 농사로 고생하시는 어머니 얼굴이 떠오르면서 어떻게든 빨리 치료해서 감쪽같이 나아야겠다 생각했어요. 역시 어머니라는 이름은 삶의 버팀목이 맞더라고요. 이후 서울 통합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하게 되었고 어머니께서도 소식을 듣고 올라오셨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장남의 사고 소식에 보리 타작하시던 복장 그대로 오신 그날의 어머니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슬픔과 함께 마음을 뭉클하게 합니다. 왼쪽 무릎 아래 절단 후 한 달을 치료하고 그때부터 저는 의족 찬 사나이가 되었어요.
중3 때 우연히 시작한 태권도로 부대 대표로까지 활동하면서 제대 후 태권도 사범의 꿈을 키우며 살아왔는데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 아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나는 어떻게 살까, 인생 포기하고 싶은 마음뿐이었어요. 꿈이 없으니 지옥 그 자체였습니다. 그때가 제 나이 24세였죠.
- 24세 청년이 감당하기에 삶이 어떠했을지 감히 상상할 수 없는데요, 그래도 반전의 계기가 있었겠죠?
▶네, 소위 방탕한 생활하던 중 보훈청 소개로 경남모직에 입사하는 행운이 찾아왔어요. 생산직 중에서도 '염료테스트' 흔히 말하는 꿀보직이었죠. 직장생활을 1년쯤 하면서 나름 안정된 삶을 찾나 했는데 제 속에 꿈틀거리는 꿈과 비전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해법을 대학진학에서 찾았죠. 야간 입시학원을 다니면서 애는 써봤지만 공고 출신으로 큰 벽을 실감했어요. 경남대학교 법학과에 두 번 도전 두 번 실패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실력에 맞지 않는 무모한 소신지원이었죠(하하하). 두 번의 실패에 또 다시 좌절 늪으로 빠졌습니다. 결국 전세금 300만 원을 다 쓰고 인생 마감하자는 생각으로 아무 연고도 없던 부산 서면 일대를 새벽까지 헤매고 다녔는데 절망감에 사로잡혀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더라고요.
그래도 어머니 모습이 떠오르면서 ‘죽었다 생각하고 1년만 더 해보자’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성실한 1년을 보낸 결과 드디어 실력맞춤형 경남전문대 영어과에 입학을 했어요. 그때부터는 공부가 술술 잘되기 시작하면서 과 수석을 놓치지 않았어요. 머리가 늦게 트인다 그러죠, 공부가 그렇게 어렵더니만 이제는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오니까 자신감이 생겨요. 올 8월 부산대학교 행정학 석사학위 받습니다(웃음). 이후 부산교통공단 공채 1기로 입사를 했는데 천직이었죠. 시민의 가까이에서 봉사하는 보람에 매일이 즐겁고 행복하더라고요.
- 접었던 꿈 태권도를 어떻게 다시 시작하게 되었을까요?
▶1995년 다리를 잃으면서 잊고 있던 태권도를 다시 해야겠다 싶더라고요. 결코 포기할 수 없던 나의 오랜 꿈이니까요. 동구 수정동 소재 태권도장에서 훈련을 시작하면서 2003 세계태권도 한마당대회 발격파 3위라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 도전을 이뤘어요. 2019년 7단 획득 의족장애인 최초로 공인 7단 한국기네스북에 등재되었고(2020 4.1), 이제는 영국 기네스북이라는 위대한 도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태권도는 저의 꿈을 이루어 주었고 재활에도 큰 도움이 되었죠.
- 의족 마라토너라는 기사를 봤어요. 정상인도 힘든 풀코스 완주라니 대단하십니다.
▶부산교통공단 마라톤 동호회 '해피런’ 소속으로 제4회 부산마라톤대회 참가했을 때였을 겁니다. 42.195km를 완주했어요. 물론 규정시간을 훨씬 지난 5시간 10분 29초였지만, 저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이었고 완주는 나와의 약속이었습니다. 제가 결승선을 통과할 때 본부석에서 아직 들어오지 않은 선수가 200여 명 정도 남았다 하더라고요. 사실 20km 지점에서부터 하중을 견디다 못한 의족 위로 살이 패이고 극심한 고통이 오더라고요. 그야말로 이를 악물고 한 발 한 발 뛰었었죠. 지금 생각하면 어찌 뛰었나 싶습니다.
- 하늘은 감당할 만큼의 시련을 준다고 했던가요, 위원장님의 불굴의 도전기는 실의에 빠져 있는 많은 분들에게 힘이 될 것 같아요. 앞으로 더 이루고 싶은 꿈이 있으실 것 같은데요.
▶장애인은 물론 힘든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고 되고 싶어요. 특히 매년 군대 폭력으로 50~60명의 병사들이 극단적 선택을 하는 안타까운 일을 보며 군대 폭력 예방 활동을 하고 꼭 하고 싶습니다. 나라 지키러 간 거지 맞으러 간 게 아닌데 군대 폭력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건 너무 마음 아프지 않습니까. 기회가 된다면 병사들을 위해 상담이나 강의를 했으면 합니다. 얼마 전 위촉 받은 부산시지체장애인협회 강서구지회장의 역할을 어떻게 해 나갈지도 고민 중에 있습니다.
된서리 맞은 국화야말로 비로소 귀한 약재로 쓰이고, 시베리아 수목한계선에서 찬바람을 맞고 자란 나무가 최고의 바이올린 선율을 낸다고 했다. 누군가 ‘나 너무 힘들어,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요’ 라고 한다면 뭐라고 얘기해 줄거냐는 질문에 그는 환하게 웃으면서 이렇게 답했다.
"지금 꼭 죽어야겠냐? 잘 생각해봐라, 죽는 거 언제든지 할 수 있다. 죽었다 생각하고 한 번 더 살아봐라"
◇김형배 선수위원장은
▶1959년 진주 출생 ▶부산 장애인 태권도협회 선수위원장 ▶부산지체장애인협회 강서구지회장(2021년 8월 취임) ▶1991년 부산교통공단 1기 입사 ▶2016년 다대포항 역장 ▶경남전문대 영어과 졸업 ▶한국 방송통신대 행정학과 편입 졸업 ▶부산대학교 행정학 석사과정(2021년 8월 석사학위취득 예정) ▶부산교통공단 마라톤동호회 마라톤대회 10km 완주 아태장애인경기대회 최종 송화봉송 주자(2002) ▶세계 태권도 한마당대회 발격파 3위(2003년, 국기원) ▶2019년 7단 획득, 의족 장애인 최초 공인 7단 한국기네스북 등재 (2020. 4.1)
<선임기자 / dododo79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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