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창 교수의 슈마허 톺아보기 <17>중간기술 관점에서 본 원자력발전의 문제점

김해창 교수의 슈마허 톺아보기 <17>중간기술 관점에서 본 원자력발전의 문제점

김 해창 승인 2018.02.20 00:00 의견 0

식수난을 겪는 남아프리카 지역에 물공급을 쉽게 해주기 위한 아이디어제품인 ‘Q드럼’ 제작사 홈페이지(qdrum.co.za)

‘인간의 얼굴을 한 기술’, 즉 ‘기술의 인간화’를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 슈마허는 거대기술의 대안으로 중간기술(Intermediate Technology)을 강조했다. 1966년 런던에서 ‘중간기술개발집단(Intermediate Technology Development Group)’을 설립해 중간기술개발에 노력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과연 중간기술이란 실제 어떤 것일까?

E.F.슈마허가 직접 설립한 중간기술개발집단의 후신인 프랙티컬 액션(www.practialaction.org) 홈페이지를 보면 프랙티컬 액션에서 주로 보급하는 ‘빈곤대처기술’이 소개돼 있다. 크게 지속가능에너지, 식량농업, 도시관개, 재해위험억제, 기후변화적응, 시장, 기술정의 등을 강조하는데 지속가능에너지와 관련해서는 소수력발전, 소규모풍력을 주로 보급한다.

이 중 소규모풍력의 경우 직경 50cm~7m 정도의 바람개비로 10~50W의 전력을 생산하고, 태양광 및 태양력 수도펌프는 100m 깊이의 우물에서 하루 3만ℓ의 깨끗한 물을 펌핑한다. 식량생산과 관련해 ‘항아리 냉장고’가 좋은 예인데 물이 증발할 때 열을 빼앗아가는 원리를 이용해 항아리 두 개와 모래 흙 그리고 물로 채소나 과일을 21일 정도 장기간 보관할 수 있는 자연 냉장고이다.

슈마허의 중간기술 개념은 여러 단계의 논의를 거쳐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로 다시 정의됐다. 적정기술은 넓은 의미로 ‘인간사회의 환경, 윤리, 도덕, 문화, 사회, 정치, 경제적인 측면들을 두루 고려하여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기술’이고, 좁은 의미로는 ‘가난한 자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기술’이다.

이러한 적정기술은 1970년대 말 미국 카터 행정부의 진보적인 정치성향과 맞물려 태양에너지를 비롯한 재생에너지 개발 등 관련 활동들이 더욱 탄력을 받았으나 1980년대 등장한 레이건 행정부의 사회적 힘을 우선시하는 정치적 논리에 밀려 급격하게 힘을 잃어버린 것이 참 안타깝다.

적정기술제품으로 잘 알려진 것으로는 공익광고에도 등장하는 식수운반기구인 큐드럼(Q Drum)이 있다. 수원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 아프리카 지역 특성에 맞춰 물통을 바퀴같이 굴릴 수 있도록 만든 것인데 한 번에 약 70ℓ의 물을 넣어 운반할 수 있다. 적정기술제품은 ‘빈곤 대처기술제품’으로 ‘빈곤비즈니스’의 시장을 열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대기업인 글로벌기업은 최소 100달러 이하의 물건은 아예 만들지 않는데 반해 이러한 적정기술제품들은 10달러 이하의 가격에 빈민들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슈마허가 창설한 ITDG(중간기술개발집단)의 후신인 ‘프랙티컬 액션이 2016년 개발한 ‘식물재배양식장’ 기술을 방글라데시농업대학에서 파일럿실험을 하고 있다. 출처: Practiacl Action 홈페이지

슈마허의 중간기술 사상을 배경으로 우리나라에도 2006년 대안기술센터(Alternative Technology Center)가 설립됐는데 ‘지역공동체와 더불어 함께하는 대안기술’을 모토로 이동근 센터소장과 민들레공동체 회원들이 협력해 공동체마을 세우기, 민들레학교 설립, 제3세계 지역사회개발 지원 및 빈곤퇴치를 위해 일하고 있다. 또한 적정기술교육기관으로 2008년 이후 한밭대학교 적정기술연구소, 한동대학교 그린적정기술연구협력센터 등이 활발히 활동을 해온다.

이러한 슈마허의 중간기술 관점에서 원자력발전은 어떠할까?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원자력-구원인가, 저주인가?’라는 제목의 한 장을 할애해 원전문제를 심각하게 다뤘다. 그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것이 인류에게 훨씬 큰 위험을 가져올 수도 있다”며 “문제의 초점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 오늘날 생존하고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미래의 후손들에게까지 심각한 위험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E.F.슈마허가 원전을 반대하는 이유도 바로 대규모 핵분열기술, 즉 거대기술이 갖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 때문이라는 것이다. 슈마허는 핵발전의 위험성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첫째, 인간은 방사능물질을 만들고 있지만, 만들고 난 뒤에는 방사능을 줄일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둘째, 사용후 방사능 폐기물을 안전하게 처분할 만한 장소가 지구상에 없다. 셋째, 용도폐기된 원자로의 해체기술도 거의 없다.

넷째, 전 세계의 방사능 수준은 시간이 흐를수록 엄청나게 높아질 것이며 운동성, 생식능력, 감각능력 같은 유기체의 특질을 약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다섯째, 플루토늄의 생산능력이 확장된다면 원자폭탄의 확산을 막을 수 있다는 희망이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었다.

슈마허는 영국 정부의 오염통제에 관한 보고서를 인용해 “인간이 해결책이 없다는 사실을 알기도 전에 원자력에 운명을 맡겨버린 것인지도 모른다는 점이 정말 위험하다. 폐기물처리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원자력계획의 실행을 늦추는 것이야말로 유일하게 신중한 태도일 것이다. 폐기물 통제방법을 알 때까지 원자로를 더 이상 건설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이는 2011년 후쿠시마원전사고 이후 탈핵 진행에서 핵발전소의 위험성을 제기하는 내용과 정확히 일치할 정도로 깊이가 있다.

E.F.슈마허의 반핵 논리는 2015년 부산지역에서 들불처럼 타올랐던 ‘고리1호기 폐쇄를 위한 부산범시민운동’에 참여하면서 새롭게 다가왔다. 당시 박근혜 정부와 한수원은 30년 설계수명연한인 고리1호기가 2007년 10년 수명연장이 된 이래 또다시 10년을 더 연장하려는 ‘수명재연장 추진방침’을 고수했다. 이에 ‘고리1호기폐쇄 부산범시민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부산시민의 절박한 상황에서 나왔고 이러한 노후 핵발전소의 수명재연장은 실은 ‘핵마피아의, 핵마피아에 의한, 핵마피아를 위한 정책’일뿐이며 이러한 잘못된 정책을 막을 수 있는 것 또한 오로지 시민들의 단결된 힘밖에는 없다는 자각에서 비롯됐다.

2015년 6월 한수원의 고리1호기 재연장 신청기한을 앞두고 2015년 2월에 부산지역의 진보 보수를 아우르는 ‘고리1호기폐쇄부산범시민운동본부’를 결성해 약 120개의 단체가 뜻을 모아 공동집회, 탈핵걷기, 100만명 반대서명, 중앙부처 앞 반대기자회견, 지역 국회의원 및 부산시장 압박 등 다양한 운동방식을 통해 결국 2015년 6월 정부와 원전당국으로부터 2017년 6월 ‘고리1호기 영구정지’ 결정을 얻어냈다.

2015년 6월 6일 을숙도 남단에서 고리1호기 폐쇄를 위한 시민행진 30차 행사를 마친 참가자들의 모습. 사진: 박중록

당시 탈핵에너지교수모임 공동집행위원장으로서 ‘고리1호기폐쇄 부산범시민운동본부’의 공동집행위원장으로 참여한 필자는 매주 빠짐없이 ‘고리1호기 폐쇄를 위한 시민행진’을 30차례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에 ‘고리1호기를 폐쇄해야 하는 10가지 이유’를 만들어 홍보를 했는데 그것은 슈마허의 탈원전론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시민단체 입장에서 고리1호기를 폐쇄해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1965년 미국의 베크(Beck) 박사가 과거 21년간 미국 원전의 원자로 및 원전 사고기록을 분석해 발표한 논문의 결론인 ‘베크의 법칙’에서와 같이 원전은 ‘예상치 못한 때 예상치 못한 원인으로 일어난다’. 둘째, 노후원전의 사고위험은 정말 높다. 셋째, 노후원전의 발전단가에 사고피해보상비용이나 사회갈등비용, 폐로비용 등을 제대로 포함하면 결코 싸지 않다.

넷째, 원전 관련 정보은폐․부정부패가 끝이 안 보인다. 다섯째, 원전사고의 피해는 천문학적이며 회복불능 수준이다. 여섯째, 2014년 4․16 세월호참사 이후 국민의 안전의식이 바뀌었고 지자체 단체장도 동조하고 있다. 일곱째, 고리1호기에서 생산되는 전기는 2013년 기준으로 국내 전력생산량의 약 0.5%로 고리1호기를 폐로해도 전력수급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하다. 여덟째, 폐로가 오히려 지역경제를 살린다. 아홉째, 세계는 이제 탈핵시대, 원전은 사양산업이다. 열 번째, 탈원전 대안이 있다. 결론은 ‘안전할 때 폐로하라!’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고 신고리5‧6호기공론화 절차를 거치는 등 사회적 논란이 많았지만 “원전 폐기물의 통제방법을 알 때까지 원자로를 건설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슈마허의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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