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김수환 추기경님의 아호(雅號)를 아시나요?

지난달 16일 김수환 추기경 11주기
'옹기 같은 사람' 인간 김수환을 그리다

허섭 승인 2020.03.21 15:41 | 최종 수정 2020.03.21 16:25 의견 0

옹기 같은 사람, 김수환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옹기’는 특별합니다. 오래된 옹기의 뚜껑을 열어 보면 십자가 문양이 그려진 게 있습니다. 무자비한 박해를 피해 산으로 숨어든 천주교 신자들이 옹기나 숯을 내다 팔며, 생계를 유지하고 종교와 양심의 자유를 지켰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 옹기는 먹는 것도 담지만, 더러운 것도 담습니다. 곡식도 담고, 오물도 담는 우리 선조들의 삶의 그릇이었습니다. 우리 자신도 여러 가지를 담을 수 있는 그런 그릇이 될 수 있을까요?
오물조차 기꺼이 품어 안는 사람. 세상엔 옹기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 소망을 담아 자신의 아호(雅號)도 ‘옹기’로 정한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의 잠언집인 『바보가 바보에게』에 실려 있는 <옹기 같은 사람> 이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2009년 2월 16일 오늘 김수환 추기경께서 우리들 곁을 떠나 하느님 나라로 가셨습니다. 살아생전 평화방송과 평화신문 공동기획으로 구술 자서전을 펴낸 일이 있었는데 그 책의 첫 페이지와 마지막 페이지의 문장을 여기 올려봅니다.

가난한 옹기 장사의 아들로 태어나 옹기 같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소박한 소명을 받잡고 한 평생 우리 모두를 품어 주는 큰 그릇으로 우리 곁에 머물다가 이제는 하느님 곁에 가 계신 분. 그분은 진정 우리들의 똥오줌까지 품어 담고자 했던 ‘소망 항아리’ 였습니다. 오늘 따라 그분이 무척 그립습니다.

 

다음 글은 김수환 추기경의 구술 자서전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의 맨 처음에 실린 글이다.

가난한 옹기장수의 막내아들

나는 붉게 물든 저녁 하늘을 무척 좋아한다. 산등성이로 석양이 기우는 풍경은 내 고향이고 내 어머니이다.

유년 시절 첫 기억은 서너 살 무렵, 경북 선산에 살 때이다. 어머니는 곡마단이 들어온 읍내 공터 구석에서 국화빵을 구워 파셨다. 난 그 옆에 쪼그려 앉아 어머니가 장사하는 모습을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옹기를 팔러 장에 나간 어머니가 해질녘이 되어도 안 돌아오시면 큰길로 나가서 어머니가 나타나실 고갯길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늘 그 시간이면 서쪽 고갯마루에 석양이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우리 집안은 조부 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본관이 광산(光山)인 조부 보현(요한) 공은 독실한 신자로 1898년 무진박해 때 충남 연산에서 체포돼 서울에서 순교하셨다. 그 바람에 아버지(김영석 요셉)는 피난길에서 태어나셨다. 아버지는 당시 박해를 피해 다니던 신자들이 그랬듯이 옹기장수로 전전하다 대구 처녀인 어머니(서중하 마르티나)와 결혼해 대구에서 정착하게 되었다.

난 5남3녀의 막내인데 가난 때문에 이사를 자주 다녀서인지 고향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대구 남산동에 태어나기는 했으나 서너 살 때는 경북 선산에서 살았다. 추측컨대 선산에서도 셋방살이를 했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 집은 왜 이렇게 가난한가, 다른 집 애들은 점심을 먹는데 난 왜 굶어야 하는가” 라는 생각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가난을 뼈저리게 느꼈을 텐데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신기할 따름이다.

선산에서 어린 나이에 항일전쟁(?)을 치른 적이 있다. 집 가까이에 일본 아이들이 다니는 소학교가 있었는데 바로 위 형과 그 아이들 간에 싸움이 붙었다. 그 싸움판에 끼어 있다가 일본 아이들이 던진 돌에 이마를 맞았다. 그때의 흉터가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다. 요즘도 가끔 사람들에게 흉터를 내보이면서 ‘항일 독립 운동의 상처’ 라고 농담을 한다.

다섯 살 무렵에 구미와 가까운 군위로 이사했다. 선산에서 군위로 이사 가느라 큰 고개를 넘은 기억이 선명하다. 군위에서 석양이 지는 고갯마루를 볼 때면 ‘저 너머에 고향이 있는데…’ 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태어난 곳이 대구임에는 틀림없지만 고향으로서 대구에 대한 추억은 별로 없다. 특히 유신 반대운동을 할 때 고향 사람들이 나를 못마땅하게 여겨 서운한 마음이 들었던 적도 있었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충청도 사람이다. 아버지가 “수환아~” 라며 나를 부르는 억양이 특이했던지 동네 사람들은 내가 나타나면 아버지 억양을 흉내 내곤 했다. 내 이름이 ‘수환’ 이란 사실은 나중에 호적을 떼어 보고서야 알았다. 동네 사람들 싸움을 잘 말리고, 바둑과 장기 두는 것을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초등학교 1학년 때 해수병으로 돌아가셨다.

그때 아버지를 위해 연도를 바치던 어머니 음성이 기억난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청국으로 보내 달라” 고 기도했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읍내에서 장사를 하는 청나라 사람이 살기는 했지만 죽은 아버지를 왜 그 사람들 나라로 보내 달라고 하는 건지…, 나중에 알고 보니 ‘천국(天國)’ 을 ‘청국(淸國)’ 으로 잘못 알아들었던 것이다.

나와 세 살 차이가 나는 형 동한과 어머니는 내 유년 시절의 전부나 다름없다. 다른 형들과 누이들은 돈 벌러 일찍 객지로 나가거나 내가 철나기 전에 출가해서 그런지 깊은 정이 들지 않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깊게 인간적 관계를 맺은 상대를 꼽으라면 단연 동한 형이다. 형이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고 소신학교에 갈 때까지 한번도 헤어져 본 적이 없다. 형은 참 좋은 사람이었고, 더할 나위 없이 동생을 사랑해주었다. 형제들은 싸우면서 자라난다지만 난 형과 싸운 기억이 전혀 없다. 형이 소신학교에서 공부하다 방학 때 집에 오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왜정 때 내가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자 내 손을 잡고 엉엉 울던 형, 나보다 앞서 신부가 된 후에는 ‘순진한 건지, 어리석은 건지 모르겠다’ 는 핀잔을 들어가면서 결핵 환자들을 돌보던 형, 동생이 추기경이 되자 행여나 불편을 끼칠까 봐 일부러 피하셨던... 형 김동한 신부는 참으로 사람을 사랑하시다 일생을 다하신 분이다.

유년 시절에서 어머니의 존재는 참으로 절대적이었다. 어머니는 당신 이름 석 자와 하늘 천(天) 따 지(地) 정도의 글자밖에 아는 것이 없었고, 가난 때문에 거의 평생토록 옹기와 포목을 머리에 이고 팔러 다니셨다. 그러나 곧은 신앙심과 여장부 같은 기질만은 대단하셨다. 그런 어머니 무릎에서 신앙심을 키우고 인간으로서 기본 교육을 받은 것을 하느님께 감사한다.

성품이 곧으셨던 어머니는 자식 교육에도 매우 엄하셨다. 특히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밖에 나가 ‘아비 없는 자식’ 이라는 소리를 들어서는 안 된다” 고 하시면서 더 엄격하게 자식들을 키우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편애(偏愛)다 싶을 정도로 이 막내아들에게 사랑을 쏟으셨다. 막내아들에게 하나라도 더 먹이려고 애쓰시는 것이 싫어서 어느 해 여름에는 “과일 먹으면 자꾸 배탈이 난다” 고 거짓말을 하고 과일을 입에 대지 않았다.

동한 형이 소신학교에 간 후로 어머니와 단 둘이서 살았다. 밤이 되면 어머니는 보통 1~2시간씩 기도를 바쳤는데 난 옆에서 뜻도 모른 채 꾸벅꾸벅 졸면서 중얼중얼댔다. 그때 기도하다가 엄마 등 뒤에서 잠드는 게 내 특기였다. 기도하기 싫다는 무언의 표시였다. 그리고 어머니는 성서나 옛 성인의 이야기, 또는 우리나라 고담 중 효자전을 들려주시곤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면 속으로 ‘나도 성인이 되고, 효자가 돼야지’ 하고 다짐하곤 했다.

한번은 찰고(擦考)를 앞두고 교리문답을 외워 놓지 않아 어머니에게 혼쭐이 난 적이 있다. 그때 효자전 이야기가 생각나 버드나무 회초리를 만들어 어머니에게 갖다 드리고는 “이 불효자를 때려 주십시오” 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매를 드시는 대신 다시 한 번 조용히 타이르는 것으로 잘못을 용서해 주셨다. 막둥이인데도 어머니 젖무덤을 만지면서 응석을 부린 기억은 없다. 그래도 어머니는 내 엉덩이를 두드리면서 “어이구 내 강아지, 내 강아지” 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우리는 늘 초가삼간에서 살고, 한때는 셋방살이도 했지만 어머니는 그 옹색한 집에서도 공소를 열었다. 봄가을 두 차례 방문하시는 신부님을 모시는 관계로 우리 집은 동네에서 유일하게 도배를 하고 살았다. 그것도 봄가을 두 번씩이나 말이다. 그때 신부님 방문은 임금님 행차나 다름없었다. 신부님이 오시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땅에 엎드려 “찬미 예수님” 하고 인사를 했다. 식사 때면 평소 구경도 못해 보던 반찬이 신부님 밥상에 올라왔는데 나중에 그것을 얻어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형과 내가 군위 보통학교에 다닐 때였다. 대구 친정에 다녀오신 어머니는 두 자식을 불러 앉히고는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하셨다. “너희는 이 다음에 커서 신부가 되거라.”

훗날 짐작컨대, 어머니는 대구 시내에서 장엄한 사제 서품식 광경을 보신 후 감동을 받으셨던 것 같다. 형은 이듬해 흔쾌히 대구에 있는 신학교 예비과(초등학교 5, 6학년)로 옮겼다. 나도 2년후 형을 따라 신학교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단지 어머니 명에 따른 것이지 신부가 될 생각은 없었다.

어릴 적 꿈은 장사꾼이 되는 것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읍내 상점에 취직해서 5~6년쯤 장사를 배워 독립한 후 스물다섯 살이 되면 장가를 갈 생각이었다. 어머니에게는 한번도 말씀드린 적이 없지만 내 나름대로 골똘히(?) 생각해서 세워놓은 인생 계획이었다.

그 계획에 미련이 남아 있었던지 신부가 된 후에도 굴뚝에서 저녁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집을 보면 부럽기만 했다.

다음 글은 김수환 추기경의 구술 자서전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의 맨 끝에 실린 글이다.

인생을 돌아보며

내 나이 85살.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자연히 과거를 되돌아보게 된다. 1941년 일본 상지대학에 갔을 때 학생 기숙사 사감이셨던 피스터 신부님은 나를 보고 기린아(麒麟兒)라고 하셨다. 행운아라는 말씀이었다.

처음에는 그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 말씀 그대로 나는 정말 많은 시련과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에 비해 여러 가지 의미로 행복한 인생을 살아왔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기 위해 부모와 집 모든 것을 떠난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백배의 축복을 받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하셨다. (마르 10 : 28~30)

이 말씀 그대로, 본래는 다른 길을 가려다가 주님께서 어머니를 비롯해 이런 저런 분들을 통해 일러주신 사제의 길을 살아온 나는 현세적으로도 백 배 아니 그 이상의 상을 받았다.

그리고 이제 미구(未久)에 맞이할 죽음을 거치면 - 부족하고 자격도 없지만 - 모든 것을 용서하시는 자비 지극하신 하느님은 당신의 그 영원한 생명으로 나를 받아주실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이 누리시는 생명,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는’(묵시 21:4) 그 생명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

아, 이 얼마나 큰 은총인가?

까를로 까레또 수사는 하느님은 당신을 믿는 사람은 짓이겨서라도 기어이 당신 것으로 만드신다고 했다. 내 경우도 어느 정도 그러했다. 신부 되는 것, 스스로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될 수밖에 없도록 인도하셨고 주교와 추기경의 삶은 명령으로 떨어졌고, 여기에 따르는 긴 세월의 삶은 단순하지 않았다. 몇 번이고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었다. 십자가를 벗어 던지고 싶었다. 그러나 결단의 용기를 내지 못하였다. 결국 ‘뜻대로 하고서’ 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죄인이다. 허물이 많은 사람이다. 하느님 앞에서는 고개를 들 수 없는 대죄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오히려 이런 죄와 허물을 통해서 - 사도 바오로가 죄 많은 곳에 은총도 충만히 내렸다(로마 5 : 20)고 하신대로 - 당신의 사랑, 당신의 자비, 당신의 그 풍성한 용서의 은총을 깨닫게 하여 주셨다.

달리 말하면 나는 죄로 말미암아 자비 지극하신 하느님 사랑을 더 깊이 깨닫고 믿게 되었다. 아니, 하느님은 죄까지도 당신 은총의 기회로 삼으셨다. 나의 하느님은 참으로 돌아온 탕자를 껴안아 주시는 어진 아버지이시다.

오, 펠릭스 꿀빠! (Oh, Felix Culpa! 오, 복된 탓이여!)

이제 나는 나를 이렇게까지 큰 은총으로 축복하여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 또 감사를 드리고 또 드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여생이 얼마일지 알 수 없으나 이제는 진실로 하느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나의 주교 표어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대로 성체성사의 주님처럼 ‘생명의 빵이 되는 삶, 모든 이의 밥이 되는 삶’ 을 살아야 한다. 하느님이 뜻하시는 대로,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이콘(ICON)이 돼야 할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온 마음을 다해,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해, 나의 모든 것을 바쳐서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주님께 영광 있으소서. 아멘

김수환 추기경님의 구술 자서전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는 평화방송과 평화신문이 공동 기획하여 출간한 자서전으로, 일차적인 구술과 정리는 2003년에 이루어졌으며, 이를 토대로 그의 생전 2004년 12월 8일 초판 발행되었다, 2009년 2월 16일 그가 하느님 곁으로 떠나가신 직후인 2월 21일 증보판이 발행되었으니, 여기에는 2007년에 이루어진 이차 구술이 추가되었다. 1998년 4월 추기경께서 30년 봉직한 서울대구장직에서 물러나 혜화동 주교관으로 물러난 이후 병마와 함께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는 노구를 이끌고 죽음의 고갯마루를 넘어가는 생애 마지막 간증이 보태어진 것이다.

어느 지면에선가 추기경님께서는 부끄럽게도 신비로운 하느님 체험 같은 걸 해 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신 걸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이 책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 역사의 고난과 치욕의 갈피마다 그분이 비껴가거나 지나치지 않고 같이하셨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이고 행운이었나를 느끼게 된다. 또 그분의 생애를 통해 중대한 고비마다 선택한 길, 내린 결단이 곧 하느님의 음성이었다는 신비를 체험하게 된다.

내가 더욱 감동한 것은 추기경님의 인간적인 고뇌와 약점과 외로움을 드러내는 대목이었다. 서울대교구장을 맡은 후부터 불면증으로 약을 처방받지 않으면 안 되는 고통은 어쩌면 사제로서 숨기고 싶은 약점일진대 그걸 드러내 보이시는 게 나로서는 오히려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인간적인 내면은 고독하고 소심하고, 중책은 무거웠을 것이다.

추기경님과 같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게 된 적이 있었다. 나는 송구스러워하며 추기경님께 먼저 타시기를 권했더니 “레이디 퍼스트” 라고 하시며 먼저 타라고 하신다. 나는 “영 레이디가 아니라서 죄송합니다”하면서 냉큼 먼저 탔더니 추기경님은 뒤에 타시면서 “나보다는 영(young)이지요” 하신다. 추기경님의 그런 가벼운 유머는 당신 앞에 딱딱하게 굳으려는 평신도의 마음을 따뜻하게 풀어 주신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고난의 우리 역사 속에서 그분을 통해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신비와 기적을 체험한다. 또 평생을 높은 자리, 무거운 직책을 썼으면서도 예술을 즐기며 천진하고 가볍게 손뼉을 칠 수 있는 추기경님의 모습을 잊지 못한다. 그분과 동시대를 사는 복을 하느님께 감사한다.

- 소설가 박완서(정혜 엘리사벳) 선생의 발문(跋文) 중에서

소설가 박완서 선생의 고백처럼, 김수환 추기경은 이 민족의 고난의 순간에 늘 함께 하시었다. 유신독재의 엄혹한 시절에 그는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예수님께서 늘 그러하시었듯이…

긴긴 민주화운동의 역사 속에서 맨 앞에 서서 싸웠던 지학순 주교나 정의구현사제단이나 문정현 신부의 입장에서는 추기경께서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주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추기경께서는 한국 종교계를 대표하는 어른으로서 항시 무게중심을 잃지 않으셨으니 매순간 그의 고뇌가 얼마나 컸겠는가?

수많은 불면의 밤을 보내면서 하느님 앞에 간구하였던 김수환 추기경, 그의 고뇌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그가 남기신 짧은 잠언을 소개하면서 나의 두서없는 추모의 글을 마칠까 한다.

 

주님의 발자국 / 김수환 

당신은 언제나 저와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가장 고통스러웠던 순간에
왜 한 사람의 발자국뿐입니까?
제가 주님을 가장 필요로 했을 때
왜 저를 홀로 내버려두셨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나는 결코 너를 버려둔 적이 없다.
발자국이 하나인 것은
네가 고통스럽고 힘겨워할 때마다
내가 너를 업고 다녔기 때문이다.

- 『바보가 바보에게』1~5권, 산호와진주, 2009년.

<배움의 공동체 - 학사재(學思齋)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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