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 시인의 단시조 산책 (42) 삶 한 벌 - 김석인
이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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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2 18:47 | 최종 수정 2022.08.05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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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한 벌
김석인
보증서 한 장 없이 백년을 빌렸건만
빗물에 젖은 소매, 바람에 할퀸 가슴
밤마다 다림질해도 잔주름만 하나 둘
김석인 시인의 <삶 한 벌>을 읽는다. 삶이 결코 두 벌일 수 없으며 그 한 벌도 빌려온 것이고, 기한은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백년 이내란 사실에 동의한다. 몇 해 전 ‘천년을 빌려준다면’이란 대중가요가 유행한 적 있었는데 절절하지만 허황된 꿈일 뿐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백년을 채우지 못한다. ‘보증서 한 장 없이’ 빌린 삶이기에 절반을 채 못 넘겨도 호소할 데가 없다.
중장 ‘빗물에 젖은 소매, 바람에 할퀸 가슴’은 여러 번의 풍상으로 편치 못했던 심신을 이야기한다. 물론 옷소매 걷어붙이고 신나게 일하던 날도 있었을 것이고, 가슴에 꽃을 단 경사스러운 날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단벌 삶에 드리워진 얼룩과 대면하는 시간이다. 대면은 종장으로 이어지면서 다림질에도 불구하고 늘어나는 잔주름에 시선이 멎는다. 옷을 오래 입다 보면 구김살이 자주 생기는 부위는 주름이 무늬처럼 자리 잡아 웬만해서는 잘 펴지지 않는다. 시인은 삶을 옷에 비유하고 있지만 이 대목에선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을 것 같다.
쇼펜하우어가 그랬던가. 죽음은 의복의 교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시인은 염세주의자의 입장을 취하진 않는다.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빌려온 삶이더라도 다림질이란 행위를 통해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늘어나는 이마의 주름살은 바로 그러한 ‘한 벌 삶’이 쌓아온 연륜이다.
◇이광 시인 : ▷2007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부산시조 작품상, 이호우 시조문학상 신인상, 나래시조문학상 수상 ▷시조집 《소리가 강을 건넌다》, 《바람이 사람 같다》, 현대시조 100인선 《시장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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