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부산 이즈 굿(Busan is good)’이라고?
이 말부터 하고 넘어가자. 이러구러 귀에 익었던 ‘다이내믹 부산(Dynamic Busan)’이란 부산시 슬로건이 변경 되었단다. 오롯이 내 개인적인 견해이지만, 찬란한 모국어인 한글을 제쳐두고 굳이 꼭 영어를 써야 하는지, 또 ‘굿 포(Good for) 무엇, 굿 포 어디’ 어쩌고 파생 의미를 염두에 두었는지 몰라도, 이 역동적으로 살아 숨 쉬는 항구도시의 정체성을 나타내기에는 아쉽고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부산이, 혹은 부산은 좋다’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주격조사가 환치된 ‘부산이라 좋다’라는 절묘한 의역(意譯)까지 살필 여력은 바쁜 세상에 힘들지 않겠나.
전 세계가 일일생활권인 글로벌 관광시대다. 세계 유수의 미항(美港)들이 언급되지만 단언컨대 부산항도 최고의 반열에 오른다. 지금도 어쩌다 외국선박 입항 시 통역과 임시 선장 노릇으로 도선사 승선 구역까지 배를 이끌 때가 있다. 새삼 감탄해 마지않는 풍경, 바다와 강과 산이 어우러진 절묘한 지형에 들불처럼 번지는 오색 찬란 도심의 불빛이 뒤덮은 야경은 감탄이 절로 나오는 그림이다. 광안대교를 위시한 거대한 교각들의 불빛은 거의 매직 수준에 가깝다. 기적이라 일컫는 비약적인 발전을 상징하는 수출입 항만으로서의 기능에, 바다에 대한 동경과 낭만까지 불러일으키는 매력적인 풍광이다.
부산은 이 나라를 세계화, 해양화로 이끄는 관문이자 전초기지 역할을 수행한다. 또한 항만, 해운물류, 조선과 선박금융, 관광과 해양레저산업, 연근해, 원양 수산물 가공 유통을 위시한 바다산업이 이 항구도시의 경제적 가치 삼분의 일을 넘게 감당한다. ‘늙은 도시’가 되어간다는 자조를 섞어 부산을 창명하는 ‘노인과 바다’라는 농담에도 바다는 빠질 수 없는 단어다. 바다는 부산의 절대 자산이다. 나도 영단어 한 마디를 보태보자. ‘더 블루(The Blue)’, 부산을 대표하는 바다색, 푸른색이 빠져있다는 아쉬움이다. 부산 태생에 뼛속까지 뱃놈 출신인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이다. 부산이 바다요 바다가 곧 부산이다.
둘, 바다는 내 운명
바다는 ‘탐험과 정복의 대상’이자 ‘상생과 공존의 현장’이기도 하다. 내가 종사했던 원양어업은 ‘인간의 삶을 대자연에 기대려 한 한 가지 방식’이자 ‘도전과 개척’으로 ‘국민 미래식량 확보를 위한 해양영토 확장’이라는 가치를 지닌다.
창공을 훨훨 나는 새(鳥) 팔자가 부러워 비행기를 조종하는 파일럿(Pilot)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이 죽일 놈의 운명에 이끌려 인생의 막장, 극한 직업의 대명사 원양어선 고기잡이로 청춘을 바다에서 다 보냈다. 얼떨결에 택한 바다 개척에 관한 대학이었다. 등록금이 최고로 저렴하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5년 내 실제 승선 기간 3년이면 군 복무로 인정받는 ‘승선근무예비역제도’ 또한 훌륭한 미끼였다. 시쳇말로 ‘똥구멍이 찢어지는’ 가난에 앞뒤 가늠할 겨를도 없었다. 이후 바다는 20년 가까이 내 거룩한 밥줄이자 인생을 관통하는 단어가 되어버렸다. 철권통치 군사 정권 하에서의 80학번, 입학하자마자 광주민주화운동(당시 표현은 ‘광주사태’, 외신도 반란, 폭동의 의미인 The Gwangju Uprising으로 표기했다) 발발로 휴교령을 겪는다. 모두가 눈먼 자들이 되어 가면의 생을 살아가던 그때, 행동하는 지성인인 대학생들의 신념과 결기가 그 비열한 세상을 변화시키려 했다. 하지만 우리는 달랐다. 창창한 앞날을 바다에 저당 잡히고 막걸리나 마셔대던 우리에게 민주화 어쩌고 하는 지엄한 구호들은 강 건너 등불이었다. 대신에 듣기만 해도 두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가는 ‘바다를 지배하는 자 세계를 제패한다.’라는 구호에 젖어 있었다. 아수라인 세상을 떠나 이상하게도 비극적이며 험난한 뱃길과, 바다와 한 판 맞장 떠야 할 우리 앞날이 축복 같은 느낌이었다.
‘아이고, 이 어린 것들이 그리 멀리 배 타러 간다고….’ 출국 인사차 들른 학교 앞 대폿집 할머니가 혀를 차며 눈물을 찍어내셨다. 횟집 2층 월세 다다미방에 어머니와 까까머리 남동생을 의탁하고, 천근만근 발길을 돌려 첫 어기 28개월 뱃길을 떠났다. 까다로운 신원조회와, 외국 항에서 도망치지 않겠다는 인적 보증까지 세우고 난생처음 촌닭처럼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먹고살기 힘든 시절의 끝물이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사람뿐인 나라에서 외화벌이 수단으로 월남전 참전, 독일 파견 광부와 간호사들에 이어 선원들 목숨을 담보로 한 바다산업이 부상했다. 독일 파견 근로자와 비교한다면, 그들이 송금해오는 액수의 스무 배가 넘는 규모에, 지금의 자동차와 반도체를 합한 비율인 전체 수출액 20% 가까운 외화를 외항선 인력송출과 원양어업에서 벌어들일 때였다.
세상이 바뀐 지금 우리 나이대 친구들과의 자리에는, 이 나라 선진 민주화를 이끌어 냈다는 투사 출신 몇은 반드시 만나게 되어있다. 술자리 농담에서 우리 뱃놈들은 돈벌이, 밥벌이로 대변되는 자신만의 일신을 위해 그 처절한 투쟁 현장을 비켜섰던 비겁자(?)로 낙인찍히기도 한다. 소이부답(笑而不答), 그저 웃고 말 수밖에. 구국의 일념으로 혈서를 쓰며 사자후를 토하던 그때 그 젊은 투사들은 더러는 변절했고, 더러는 충실한 정치판 끄나풀 노릇 대가로 부와 명예라는 성취를 이뤘다. 몇 년 전 해적에 나포된 선원들을 구하러 급파한 해군함정을 두고, 한낱(?) 선원 몇 명 구하는데 조용히 물밑 협상으로 진행해야지, 분단국가에서 전투력 공백을 야기하는 심각한 국력 낭비를 한다고 주장하던 운동권 출신 모 정치 인사에게 이런 표현을 쓴 적이 있다. “그 입 다물라. 국민을 안전에서 지켜주지 못한다면 과연 이게 나라라 할 수 있나? 인질 노릇 하루만 바꿔 경험해 보든지, 파도가 뒤집어엎는 바다에서 단 하루만 배에 올라 장 청소 삼아 설날 먹은 떡국까지 게워 내보고 말씀하시라. 원양선 종사자는 모두가 수출역군들이다. 너희가 진정한 애국을 아느냐?”
셋, 인권? 인본? 그게 어느 나라 말인데
우리는 ‘특례보충역’이었다. 올림픽이나 국제 대회 입상자들에게 국위선양에 상응하는 관용을 베푸는 제도로 알려져 있지만, 주된 취지는 국가기간산업인 방위산업체나 원양선박에 승선하는 젊은이들에게 일정 기간 근무로 군복무를 대체해주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이 ‘승선근무예비역제도’는 ‘노예계약’과 다름없었다. 초인적인 생존 감각을 익히기 위한 정신 주입용 사랑의 매(?)는 기본이었고, 시간에 쫓기거나 하면 금방이라도 침몰할 것 같은 소위 ‘똥배’에 올라야 할 경우도 있었다. 바다에서의 기억들이 부표처럼 떠오른다. 한국 어선들은 가장 멀고도 험한 바다로 나갔으며 그곳에서 가장 오래 머무는 배들이었다. 업무강도는 가히 살인적이었다. 말단 항해사 시절, 닭장 같은 침실에 흡사 관처럼 짜인 좁은 침상에서의 짧은 잠도 사치였다. 열두 시간 항해, 어로 당직에 고기가 많이 잡힌다 치면 이틀에 한 타임 꼴 6시간 취침이었다. 그마저도 당직 교대, 식사 시간을 포함한 수치였지만. 지천에 깔린 게 생선이라 그것들로 차려낸 풍성한 식탁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황천 파도에 그릇을 들고 서서 몸의 균형을 잡으며, 비록 최대 15분을 넘길 수 없는 식사 시간이었을지라도. 마실 물까지 자급자족해야 할 처지였다. 당시 조수기(造水機)의 원리는 엔진으로 데운 바닷물을 증류한 물방울을 모으는 방식이었다. 이런 마당에 비린내 등청하는 작업복은 그냥 해수비누에 발로 밟아 빨고. 조업 때는 늘 바닷물 목욕이었다. 시대를 앞당겨 원도 한도 없이 해수탕에 몸을 담가봤던 셈이다. 온몸이 소금기로 서걱거렸다. 무인도에 표류한 ‘로빈슨 크루소’의 지지리 궁상 삶과 다름없었다. 대책 없이 밀려드는 잠을 쫓기 위해 양동이에 휘저은 걸쭉한 커피를 국자로 마셔대며, 기꺼이 서서 잠자던 그 처절한 노동의 이면에는, 가장 노릇으로 식솔들을 책임져야 하는 절체절명의 숙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선원들 모두가 ‘자상한 아버지’보다‘굶기지 않는 아버지’의 덕목이 우선이던 시절이었으니. 시절이 그러했다. 딴 나라 선원들이 죽어도 못 타겠다는 똥배나 고철 중고선들도 한국 선원들이 올라갔다 하면 외판부터 내부까지 며칠도 안가 새 배로 환골탈태했다. 돌이켜보면 인권 차원에서는 너무도 안타깝지만, 앞만 보고 달려야 했던 시절의 전쟁터 무용담에 가까운 이야기들이다.
넷, ‘난쏘공’과 ‘노동의 새벽’, 그리고 피를 말리던 고기잡이
그 와중에도 출국 보따리에 챙겨 넣었던 책들이 생각난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노동의 새벽’ (두 권 사이에는 몇 년 시차가 있다). 뱃놈인 우리라고 왜 자유와 민주, 혁명과 해방을 몰랐겠는가. 그 시절 청춘 모두를 짓누르던 서늘한 불안과 알 수 없는 죄의식을 달랠 목적도 조금은 있었지 않았나 싶다. 독서마저 사치라 여길 열악한 환경이었다. 밀려오는 졸음에 겨우 몇 줄씩 뒤적거리며 정리되지 않는 사고를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난다.
‘난쏘공’에서 작가 조세희는 ‘키 작은 노동자들’은 날마다 자본에게 매를 맞고 착취당하고 있으며, 산업사회 계급 갈등이 점점 악화될 수밖에 없는 문제라 단정 짓고 있었다. 합리적인 방식으로는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시각이었던지, 자살과 방화, 살해와 같은 과격한 형식으로 시대를 자책하고 있었다. 박노해의 글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나 사고를 문장화해 내뱉는다는 느낌이었다. 노동을 자본체제 유지 수단으로 규정짓고 그들의 탐욕에 항거하자는 구호로 읽혔다. 미래에 대한 희망만으로 개고생 중인 우리 모습을 환치도 해보면서, 눈을 닦고 찾아 봤지만 해결책이라고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데? 편협하고 삐딱한 사고의 젊은 뱃놈 눈길에는 도무지 오리무중이었다.
꿈에 그리던 선장이 되었다. 선박과 선원들 생명 같은 유무형의 막대한 재산과 가치를 지켜낼 책무를 위임받은 자리다. 자본과 노동, 동시에 양쪽 입장에서 이해타산과 갈등도 조율해야 하는 직무이기도 했다. 엄청난 부담과 책임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한국어선의 조업 실적은 다른 나라 배들 두세 배가 넘는 압도적인 수치였다. 선배들로부터 살벌한 방식으로 물려받은 악과 깡, 조금 더 순화해서 패기와 절박감이 먼저였다. 조업방식은 바로 전쟁을 치러내는 형국이었다. 함포를 장착한 경비정에 쫓기며 경계수역을 넘나드는 월경(越境) 도둑 고기에, 태풍 속 쓰러질 듯 기울어진 배를 끌며 쟁기질하듯 바다를 긁어대는 그물질이었다. 기상이 조금만 거칠어도 부리나케 피항을 하던 외국 선장들이 걱정 반, 비아냥 반으로 묻고는 했다. “코리안, 도대체 그대들 목숨은 몇 개나 되나?” 고기를 잡지 못하는 선장은 전쟁에 패한 장수 대접밖에 받지 못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대어 만선으로 회사를 일으켜 세우고, 선원들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게 어선 선장의 숙명이었다. 경쟁사회에서 배우고 자란 본능적인 승부욕도 한몫 더했지 싶다. 거기에다 소위 노가다 판 ‘돗내기(도급)’작업까지 따라붙는다. 잡아 올린 고기를 모두 가공 처리 해야만 그제야 잠과 휴식을 허락하는 무자비한 방식이었다. 본분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에 앞서 피를 말리는 고역이기도 했다.
다섯, 다시 바다 앞에 서서
세월이 한참 흘렀다. 많은 친구들이 바다를 떠나고 또 많은 친구들이 바다를 떠나지 못했다. 나 또한 바다를 떠났으되 버리지 못한다. 분명 몸서리칠 만큼 징글징글했는데도 슬그머니 세월이 개입해 고통을 환희로 탈바꿈시키며, 그것들이 추억이라는 당의정으로 둔갑되는 희한한 경험을 한다. 고통과 황홀을 번갈아 선사하던 바다에서 보낸 시간은 새로운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었고, 문신처럼 몸에 새긴 바다에서의 경험은 더 크고 먼 세상으로 걸어 나갈 수 있게 했다.
이쯤에서 호흡을 가다듬는다. 이 글의 목적은 부산, 나아가 이 나라의 발전과 개발에 일조했다는 자위나, 시절이 그러했으므로 모두가 아팠다는 신파를 들춰내는데 있지 않다. 특수한 영역임이 분명하지만, 산업화의 어두운 그늘인 무조건적인 협동에 제한된 자유와 희생을 언급하려다 회고해 본 보잘것없는 작은 역사일 뿐이다.
작금의 민주 시민사회에서는 비인간적 삶의 만연을 누구도 바라지 않는다. 근래에 들어서는 승선계약과 조업 기간 단축, 승선 대기 시 지원금과 현실화된 수당 지급, 최소한의 휴식 보장과 육지와의 통신 기술 발달 등으로 열악한 환경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하지만 경제발전에 따르는 인식 변화로 한국 선원들의 승선 기피가 이어진다. 고육지책으로 조선족 선원들을 태웠다가, ‘페스카마호’ 선상 반란사건 이후 인도네시아, 베트남, 미얀마, 필리핀을 거쳐 바다 구경도 못 한 사람이 태반인 산악국가 네팔인들을 태울 지경까지 왔다. 어느 한 나라 선원들을 많이 태운다면 조직적인 반란이나 힘과 알력의 균형이 깨질 것을 우려해, 나라별 비슷한 숫자로 선원을 태워야 할 웃지 못할 상황까지 왔다는 말이다.
두 가지 마음이다. 뭍이든 바다든 어디에서도 인간다운 삶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바람이 먼저다. 또 하나는 선장이나 기관장 같은 고급 사관들마저 3D니 4D니 힘든 선상생활에 지쳐 바다를 떠나거나 젊은 친구들이 승선을 외면한다면, 고기는 누가 잡고 원양어업 강국의 갈 길은 어디일까 하는 오지랖 넓은 나라의 미래에 관한 걱정이다. 이 두 마음은 개발과 발전에 따르는 자기희생이라는 최면효과와 인간적 가치라는 면에서 반드시 충돌한다.
여섯, 일인칭 뱃사람 시점
물리적인 나이로 이순(耳順)을 넘겼으니 온갖 애증들이 뭉뚱그려지며 단순한 이해로 녹아들어버리는 인생의 어느 지점, 그만한 나이는 먹은 셈이다. 세월로 인해 자연스레 터득하게 된 이치들로 맨 처음 인간, 인본에 관심을 가지게 했던 사십 년 전 독후감을 조금 더 이어나가 본다.
작년 말 세상을 뜬 ‘난쏘공(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의 조세희 작가가 생전에 말했다. 자유와 민주가 무에 그리 대단한 말인가. 그러나 속박당하니까 보석 같은 말이 되어버린다. 벼랑 끝에 다다른 세상에 ‘위험표지판’ 하나라도 세워야 한다는 게 그 글을 쓸 때의 심정이었다…. 억압된 세상과 대결하는 수단은 단지 글뿐이었을 것이니, 현실을 지우는 지우개 역할까지는 버거워 ‘주위를 일깨워야 한다’라는 소명 의식을 가졌을 법하다. 투쟁적인 언어를 구사하던 박노해는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라고 천명한 후에 반전평화운동에 전념한단다. 인간에 대한 희망을 실천으로 옮기는 방법론이 바뀐 것 같아 보인다. 이념의 난투극을 지양하는 조용한(?) 행보를 변절이 아니라 진화로 보는 쪽의 시각에 동조하고 싶다. ‘난쏘공’이 100만 부를 찍은 15년 전에도 작가는 “지금 상황도 그때와 다르지 않다.”라고 한탄했다. 소위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진보정부를 거친 민주화시대에 살고 있지만, 혹자들은 우리 인본주의 환경에 현저한 개선이 있었다 말하고 반대편에서는 전혀 유의미한 변화가 없는 답보상태라 여긴다.
법률적, 제도적 개정을 일으켜 가장 신속하게 사회적 기류를 변모시키는 기능을 가진 정치는 국가 위상에 걸맞은 행보를 보이지 못했다. 하여 개선과 변화를 위해서는 깨어있는 사람들이 세우는 ‘위험표시판’과 ‘건전한 정책개발과 제안’이 최선책일 수밖에 없었다. 2000년대 밀레니엄 시대를 앞두고 당대의 논객 김지하와 황지우의 대화에서도 이런 말들이 나왔다. 가물거리는 기억이지만 내 방식대로 옮겨본다. 이 또한 이미 20년 전의 언어들이다.
‘오늘날 문명은 생명과 인본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에 실패했다. 시대착오적 교육으로 주위 모두가 경쟁자, 혹은 적으로까지 여기게 된 인성에 사회의 고통을 공감하는 능력을 잃은 결과다. 제국주의, 식민주의, 마르크스주의, 모더니티로 규정된 몰디드(주형)에 의해 강제적으로 쥐어짜인 우리 삶을 회복해야 한다. 교육이건 예술이건 사회운동이건 최선의 가치는 인간적인 것을 행하는 데 있다. 고질적으로 뿌리박힌 사회적 계급에서 비롯하는 빈부갈등, 지역갈등 같은 것들도 서로 끌어안고 눈물을 쏟아내는 의식이 있어야 하는데, 정치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고 결국 문화(사회운동?)가 그것을 해내야 할 것이다.’ 김지하가 환경파괴, 도덕의 황폐화 같은 총체적 혼돈과 위기를 극복하고자 제안한, 우주와 인간의 새로운 중심음(音), 중심원리를 확립하자는 ‘율려(律呂)’운동도 깊고 넓은 인성을 가진 신(新)인간, 그러니까 인본주의에 입각한 전방위적 문화운동을 뜻한다.
일곱, 희망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민주사회 핵심 가치는 자유와 다양성이다. 세상 어디에서건 솟구쳐 오르는 반발의 기운이 있고, 그 에너지를 억누르려 형성되는 알력이 있다. 그리고 그 힘들은 서로 연결되어 함께 끊임없이 변한다. 일례로 계급 간 갈등을 대결 구도만이 아니라, 난쏘공에서의 뫼비우스 띠의 은유처럼 서로를 일으켜 세우며 맞물려 돌아가는 ‘공존의 숙명’이 존재한다는 걸 인정한다면, 자본주의 시스템 전체를 뒤엎지 않고도 ‘지속가능한 착한 세상’이라는 좋은 미래를 기대할 수도 있다. 견제와 균형, 소통과 합의에 인간 존중이라는 공동가치를 잊지 않은 관용과 상호존중의 방식은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
‘공무도하가’는 현실을 가로막는 장애물인 ‘물’을 건너다 익사하고, 남겨진 자들의 슬픔을 노래했다는 고대 서정가요다. 민족 정통 정서인 정한(情恨)을 읊었다는 일차원적인 해석보다, 긍정적이며 깨어있는 사람들이 헤아린 보다 더 진일보한 이해가 눈길을 끈다. 물을 공포의 대상, 삶과 죽음의 경계가 아닌 재생(再生)의 원천으로 보고, 힘든 세상일지라도 아파하고 공감하며 함께 살아가자는 다독임의 생략을 환기시키는 역발상은 모두에게 유익하다.
선도적 문화는 삶의 진보와 개선에 직결되어 있고, 사회를 성찰하며 ‘착한 미래’를 모색하는 순기능을 가진다. 지속적이고 실용적인 정책개발과 그 실천은 공동체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거북한 엄숙주의와 고담준론, 왜곡된 온정주의를 지양하고, 사람중심 가치실현을 위한 사회적 공론을 형성하며, 행복추구권을 인정하는 세상으로 향하는 인본사회연구소의 활동에 격려와 응원을 보낸다. ‘늙은 도시’ 부산에 활력을 가져올 청년문화 확산 정책 개발도 기대한다.
알 수 없는 넓은 세상으로 인도하는 출구였으며, 부활의 몸짓을 안아주던 공간이던 바다로 다시 눈길을 돌린다. 그 아득하던 절망 속에서의 이해할 수 없던 카타르시스를 상기시키며, 흥겨운 남사당패 가락처럼 언제나 바다는 가슴속에서 너울댄다. 모두에게 행복한 세상이 오기를.
*장편수기 ‘마린보이의 꿈’에서 일부 발췌, 재구성한 글이다.
◇ 하동현
부경대(옛, 수산대 어업학과) 졸업
원양어선 선장. 운반선 감독관
현재 수산물 수출입업. 해양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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