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못 하나가 없어서 나라를 잃었네’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동물을 하나만 꼽자면 단연코 ‘말’이다. 말은 자동차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가장 빠른 교통수단이었다. 20세기 독일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는 인류가 역사를 가지는 존재로 성장할 수 있었던 요인 5가지를 들면서 문자, 언어, 신화와 함께 말을 포함 시켰다. 말은 사냥의 효율을 높이고 전투의 양상을 바꾸었다. 『말이 바꾼 세계사』의 저자 모토무라 료지는 말과 전차의 등장이 근대의 화기(火器)보다 당시의 세계 판도에 어쩌면 더 커다란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를 만큼 대사건이라고 할 정도이다.
말은 돼지나 소, 개 등에 비해 가축화가 늦었지만 식용이나 농경이 아닌 전투에 투입되는 거의 유일한 동물이다. 빠른 이동이나 전투를 위해 개발된 마구들이 안장, 편자, 등자 등이다. 야생마는 초원에서 유유히 걸어 다니다가 위험한 상황에서만 달렸기 때문에 편자가 별로 필요 없었다. 로마 제국 이후 포장도로가 많아지면서 말발굽의 마모가 심해져 말을 위한 전용 신발(horseshoe), 편자가 등장했다. 편자는 한자어처럼 보이지만 순수한 우리말이다.
‘못 하나가 없어서(For want of nail)’라는 15세기 영국 민요도 편자의 중요성을 노래하고 있는데 최근 2021년 2월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이 노래를 비장한 표정으로 인용하면서 다시 화제가 되었다. 21년 2월은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한 지 불과 한 달 뒤였다.
못 하나가 없어서 말편자를 잃었네
말편자가 없어서 말이 다쳤네
말이 다쳐서 전령을 못 보냈네
전령을 못 보내서 전투에서 패했네
전투에 패해서 나라를 잃었네
못 하나가 없어서 전부를 다 잃었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반도체, 자동차용 배터리, 희토류, 의약품 등 4개 품목의 글로벌 공급망에 대한 검토를 지시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하는 자리에서 반도체를 말발굽 편자의 못에 비유한 것이다. "공급망의 한 지점에서 작은 실패라도 발생하면 공급망 전체에 충격을 가할 수 있다"는 것이 바이든의 요지였다. 공급망 검토 행정명령 한 달 뒤인 21년 3월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이후 첫 기자회견에서 의미심장한 발언을 한다.
바이든 대통령은 “내 임기 중에 중국이 세계 최강대국 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미래는 인공지능과 생명공학 등 과학기술을 누가 소유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밝혔다. 이 말을 뒤집으면 중국의 추격이 맹렬하고 추월당할 위험성도 상당하다는 의미이다.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전쟁의 뒷단에서 벌어지는 것이 바로 반도체 전쟁이다. 반도체는 데이터를 저장(메모리 반도체)하고 연산․논리 등 정보처리(시스템 반도체)를 한다. 반도체는 자동차, 휴대폰, 노트북, 냉장고 등 소비재뿐만 아니라 에너지, 운송, 항공, 금융, 첨단 무기 등의 필수 원자재이다. 사회 인프라와 국가 안보가 반도체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반도체 산업은 기술 패권 경쟁이 가장 치열하게 일어나는 전장이다. 그것이 미국과 중국이 지금 반도체 전쟁을 벌이고 이유이고, 2019년 9월 일본이 반도체 소재 부품 3가지를 콕 집어서 한국에 수출규제를 한 이유이다. 그것이 바이든이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방문하는 첫 번째 아시아 국가로 일본보다 한국을 택하고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용인의 삼성반도체 공장을 찾은 이유이고, 미국이 반도체법으로 삼성과 SK, 대만의 TSMC를 압박하고 있는 이유이다.
Ⅱ. 반도체의 등장과 실리콘 밸리
반도체(半導體)는 이름과는 달리 전기가 반만 통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조건에서만 전기가 통하는 물질을 말한다. 실리콘과 게르마늄 등 몇몇 원소는 특정 조건, 예를 들면 전압이나 열, 빛의 파장 등에 의해 전기가 흐르기도 하고 흐르지 않기도 하는 특성을 지닌다. 이러한 현상을 발견한 과학자들은 이 특성을 활용한 물건에 ‘반도체(semiconductor)’라는 이름을 붙였다. 디지털 세상이 아날로그 세상의 기준인 십진법이 아니라 0과 1의 이진법 세상이라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이진법 세상은 ‘전류가 흐르면 1, 전류가 흐르지 않으면 0’이라는 반도체의 물리적 특성에 따른 것이다.
반도체 사용이 본격화된 것은 반도체로 만들어진 트랜지스터의 발명 이후부터이다. 트랜지스터를 발명한 ‘반도체의 아버지’ 윌리엄 쇼클리는 1957년 캘리포니아 팔로알토 지역에 ‘쇼클리 반도체연구소’를 세운다. 이른바 ‘실리콘 밸리’의 시작이다.
반도체는 규소 결정에 불순물을 넣어서 만드는데 규소의 영어 이름이 실리콘이다. 이 지역에 많은 반도체 회사가 모여들고 나중에는 애플, 구글, 페이스북, 인텔과 같은 거대 ICT 기업도 이곳에 자리 잡는다. ‘쇼클리 반도체연구소’의 연구원들은 나중에 연구소를 나와 인텔, AMD 같은 반도체 회사를 설립한다. 1960년대부터는 라디오, 텔레비전, 계산기 등에 반도체가 사용되면서 반도체 산업은 호황을 맞았다. 1980년대까지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와 인텔 중심의 미국 반도체 산업은 전성기를 맞았다. 이 당시의 반도체는 모두 메모리반도체였고 특히 인텔은 1970년대 초 세계 최초로 D램 개발에 성공해 한때 세계 D램 시장의 90%를 차지하기도 했다.
컴퓨터 광고에 삽입되었던 ‘인텔 인사이드(Intel Inside)’를 기억하는가? 인텔은 컴퓨터 회사가 자사 제품을 광고할 때 중간에 인텔 인사이드 마크와 효과음을 노출시켜주면 CPU 가격을 6% 깎아주면서 인텔의 브랜드 이미지를 강화시켰다. 하지만 1985년 이후 세계 반도체 시장은 일본의 시대로 넘어간다. 일본 기업들은 상대적으로 낮은 일본 노동자들의 임금과 환율, 특유의 기술력으로 순식간에 D램 시장을 장악했다. 일본 업체들의 무기는 메인프레임(기업 등 대용량)용 고용량 D램 반도체였다. 일본 기업들의 약진은 미국 반도체 시장에서 ‘제2의 진주만 폭격’으로 불릴 정도였다. 1990년대 초까지 세계 10대 반도체 기업 가운데 일본 기업은 일본전기(NEC), 도시바, 히타치, 후지쯔, 미쓰비시, 마쓰시타 등 6곳이나 되었다. 이 무렵 일본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책이 소니의 창업주 모리타 아키오와 나중에 도쿄지사가 되는 극우 정치인 이시하라 신타로가 공저한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1988)이다. 이시하라는 OPEC 회원국들이 석유 수출 통제를 무기 삼듯, 일본도 반도체 수출을 무기로 더 이상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당당한 일본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국은 우방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칼을 뽑았다. 1985년 ‘플라자합의’를 통해 일본의 환율을 강제로 인상시켰다. ‘플라자합의’ 당시 1달러에 235엔이었던 환율은 1년 뒤에는 1달러에 120엔대까지 올라간다. 미국 소비자나 기업 입장에서는 일본 제품 가격이 1년 사이에 두 배로 뛴 것이다. 그래서 플라자합의를 ‘일본에 대한 미국의 경제적인 원폭 투하’라고 할 정도이다. 이 합의로 일본은 엔고 현상, 부동산 경제 버블 등 엄청난 경제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른바 ‘잃어버린 30년’의 시작이었다.
한편 한국은 미국 달러에 비해 여전히 원화 가치가 낮았기에 일본 엔화 대비 가격 경쟁력이 상승하여 수출이 늘어나는 큰 수혜를 보았다.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약진이 시작된 것이 이 무렵부터이다. 개인용 PC 판매가 급증하면서 한국 기업들은 메모리 기능은 낮지만 값싼 PC용 D램을 대량 생산했다. 한국 기업들의 장점은 기술력보다는 대규모 투자와 저임금에 기반한 가성비였다. 최근 출간된 미 터프츠대 교수 크리스 밀러의 저서 『칩 워(Chip War)』에 따르면 미국도 ‘적의 적은 친구’라는 판단 하에 일본의 반도체 산업을 견제하기 위해 한국을 적극 지원했다는 것이다. 인텔은 당시만 해도 기술력이 부족했던 삼성의 메모리칩에 인텔 브랜드를 붙여서 팔 수 있도록 했고 부도 위기에 몰렸던 미국 기업 마이크론은 삼성에 64K D램의 설계를 제공하고 라이선스 생산을 허용했다.
Ⅲ. 미국, 한국, 중국, 일본 - 물고 물리는 반도체 전쟁
반도체 시장은 크게 메모리 반도체와 비메모리 반도체 시장으로 나뉘는데 한국 기업들이 우세를 보이는 시장이 메모리 반도체 시장이다. 메모리 시장은 전체 반도체 시장의 30% 수준이다. 비메모리 시장은 설계 중심의 팹리스와 위탁설계를 하는 파운드리 업체로 나누어진다. 대표적인 팹리스 업체가 엔비디아, 퀄컴이고 대표적인 파운드리 기업이 대만의 TSMC이다.
한국은 반도체 제조 장비는 미국, 일본, 독일, 네덜란드 등에서 수입하고, 반도체 소재인 실리콘, 불화수소 등도 대부분 수입에 의존한다. 자동차 수출 세계 3위 국가라고 하지만 메모리반도체 중심이므로 차량용 시스템 반도체도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 2019년 7월 1일 일본은 반도체 핵심 소재 3가지의 한국 수출규제를 발표한다. “일본이 한국에 수출한 전략 물자가 북한에 유출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규제 이유였다. 일본의 수출규제 발표 이후 한국 야당과 언론 그리고 이른바 전문가들은 반도체 공장이 가동을 멈출 수 있다면서 한국 정부의 사실상 굴복을 요구했다.
한국경제신문은 2019년 12월 13일자 기사에서 일본은 소재 분야에서 기술을 넘어 예술에 오른 경지라며 일레븐나인(99.999,999,999%)으로 불리는 초고순도 불화수소는 한국에서는 절대 만들 수 없다고 보도했다. 주옥순 엄마부대 대표 등 일부 보수 시민단체는 문재인 대통령이 아베 총리에게 머리 숙여 사과할 것을 주장했고 당시 야당이었던 자유한국당도 무역 분쟁은 한국에 승산이 없다고 정부를 비판했다. 2년 뒤 일본 아사히신문은 “대한국 수출 규제는 어리석음의 극치로 일본 기업만 손해를 보았다”고 보도했다. 일본이 수출 규제했던 3가지 품목은 국산화, 수입 다변화되었다.
일본의 수출 규제 발표는 2019년 6월 30일 판문점에서 미국, 한국, 북한 정상 간 회동이 이루어진 바로 다음 날이다. 그만큼 일본의 충격은 컸다.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당시 일본 총리는 만세를 불렀다. “이것은 일본을 위한 천우신조(天佑神助)다!"
한국의 전 국토가 폐허가 되고 남북한 합쳐 300만 명이 죽거나 실종되는 기간에 일본은 병참기지 역할을 하면서 경제적 이익을 챙겼다. 그 결과 한국전쟁이 끝나기도 전인 1952년 일본은 이미 2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의 경제 규모를 회복했다. 일본이 ‘잃어버린 30년’을 겪는 동안 분단된 한국의 1인당 가처분소득이 2019년 기준 일본보다 많아지는 등 임진왜란 이후 지속되어 온 한반도와 일본 간 국력 격차가 역전되기 직전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남북한 평화 공조와 경제공동체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은 일본 입장에서는 끔찍한 악몽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 한국의 기업들은 반도체뿐만이 아니라 다른 소재부품의 경우도 일본에만 100% 의존하지 않고 수입 다변화를 하고 있다. 규제 대상이었던 불화수소, 포토레지스트, 불화폴리이미드 3개 소재뿐만 아니라 황산, 인산과 같은 기초 화합물부터 솔벤트 같은 세정제까지 소재 전반에 걸쳐 대기업이 국내 제품을 구매하고 있고 한국에서 생산되지 않는 소재는 개발요청을 하고 있다. 공급망 안전에 대한 의식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는 23년 3월 한일정상회담에서 일본의 ‘이미 현실적으로 아무 의미도 없는’ 수출 규제 해제 약속을 큰 성과라고 주장하며 징용 배상금 문제, 지소미아 문제 등을 대폭 양보했다. 현금을 주고 어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미 부도 처리된 수표를 실적이라고 들고 온 것이다.
2023년 5월 16일 기준, 전 세계 글로벌 기업의 시가총액 순위를 보면 미국 엔비디아가 956조 원으로 6위, 대만 TSMC가 574조 원으로 13위이다. 삼성전자는 대략 35위 수준이다. 챗GPT나 구글 바드 같은 생성형 AI 열풍 속에 엔비디아의 AI 반도체 개당 가격은 최대 4만 5천 달러 수준이다. 이에 비해 삼성전자의 반도체 개당 가격은 3~4달러 수준이다. 시장이 바라보는 기업 가치가 큰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장비, 소재, 부품까지 포함한 전체 반도체 시장을 점유율 기준으로 보면 2020년 미국 50.8%, 한국 18.4%, 일본 9.2%, 유럽 9.2%, 대만 6.9%, 중국 4.8% 등이다. 그럼에도 미국은 노골적으로 반도체 패권을 노리고 있다. 미국 반도체법은 미국 내 공장설립에 일부 재정 지원을 명분으로 시설 접근 허용과 상세한 회계자료 제출, 초과이익 공유, 중국 공장 증설 억제 등을 요구하고 있다. 영업비밀은 공개하고 중국에는 첨단 반도체 수출을 사실상 하지 말라는 것이다. 반도체는 단일 품목으로 한국 수출의 20% 정도이고 반도체의 40%는 중국으로 수출된다. 홍콩까지 포함하면 60%에 이른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대중 관계 악화와 반도체 수출 부진으로 1992년 수교 이후 처음으로 연간 대중 무역적자가 예상된다. 2021년 한국은 293억 달러의 무역흑자를 기록했는데 그 가운데 83%가 중국과의 교역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2022년에는 대중교역 흑자가 12억 달러로 급감하면서 전체 무역수지는 사상 최대 규모인 477억 달러 적자가 되었다. 대중교역 적자는 올해 더욱 커져 4월 현재까지 252억 달러 적자 중 100억 달러에 이른다. 반면 한국을 앞세워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막으려고 하는 미국은 중국과 2023년 사상 최대 규모의 교역량을 기록하고 있다. 미국 크리스 밀러 교수는 올해 초 출간된『칩워, 누가 반도체 전쟁의 최후 승자가 될 것인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제2차 세계대전은 철강 생산량으로 승패가 결정됐고, 냉전은 핵무기가 중요했다. 미국과 중국의 경쟁은 반도체를 바탕으로 하는 컴퓨팅 파워로 승자와 패자가 결정될 것이다.”
Ⅳ. 세계화는 끝났다 – 소는 누가 키우나?
미국의 경제학자 마크 레빈슨은 2020년 출간된 『세계화의 종말과 새로운 시작』에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한다. 2016년 6월 펜실베니아주 모네센에서 공화당 대통령 후보 트럼프는 세계화를 정면으로 공격했다. “세계화는 수백만 명의 노동자에게 단지 가난과 마음의 고통을 남겼을 뿐이다.” 이 지역에서 트럼프는 힐러리 클린턴에 비해 2배 이상의 표를 획득해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세계화로 인해 미국 제조업이 쇠락하면서 일자리를 해외에 뺏긴 백인 남성들의 표 결집 때문이었다. 바이든은 트럼프가 내세웠던 ‘아메리카 퍼스트’ 정책을 더욱 독하게 추진하고 있다.
세계화 시대에는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생산기지를 외국으로 이전해 싼값에 제품을 생산하는 오프쇼어링(Offshoring)이 대세였다. 지금 미국은 트럼프에 이어 바이든이 해외 생산 시설의 자국 이전, 리쇼어링(Reshoring)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고 나아가 첨단 먹거리 공장의 미국 내 설립을 압박하고 있다. 전기차도 그렇고 반도체도 그렇다.
미국은 대외관계에서 이상주의적 가치를 전면에 내세우는 척 하지만 가치와 이익이 충돌하면 늘 경제적 이익을 택해왔다. 경제적 이익이 우선인 세상에서 혈맹 운운하는 국가는 호구가 되기 십상이다. 1880년 강화도조약의 불평등조항 시정을 요구하러 일본에 갔던 김홍집은 주일 청국공사관 참사관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을 들고 온다. 한국으로 치면 중앙부처 3급 과장 정도인 황준헌이 조선의 살길이라며 적어 준 약 6천 자 분량의 『조선책략』요지는 중국과 친하고(親中國), 일본과 맺고(結日本), 미국과 연결(聯美國)함으로써 자강을 도모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힘이 없는 나라가 다른 나라의 선의에 기대 생존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조선책략』은 고종을 비롯한 조선 지도층의 바이블이 되었고 멕시코 전쟁 등 국내 문제로 해외에 시선을 돌릴 여유가 없었던 미국은 영토적 야심이 없는 동양의 수호천사로 인식되었다.
1882년 미국과 맺은 수호통상조약 1조는 눈물겹다. 조선이 다른 나라와 분쟁이 있을 때 미국이 거중조정(Good office)에 나선다는 것이다. 조선은 이를 철석같이 믿었다. 하지만 늘 자국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선택해 온 것이 미국의 역사이다. 구한말 한국 지도층의 바이블이 『조선책략』이었다면 최근 한국 보수 엘리트들의 경전은 피터 자이한의 『각자도생의 세계와 지정학』, 『붕괴하는 세계와 인구학』 같은 책들인 것 같다. 피터 자이한이 바라보는 미래는 이렇다. 자원도, 내수시장도 없는 수출 중심 국가, 저출산 고령화라는 최악의 인구구조를 가진 한국은 독자적인 생존이 거의 불가능하다. 2030년대가 되면 한국의 수출주도 경제모델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이에 대한 자이한의 대안은 이렇다. 자이한에 따르면 미국은 이미 비공식적으로 미국을 대신할 아시아 지역 맹주로 일본을 낙점했다. 인도-태평양 지역에서는 일본이 미국을 대리해 중국을 견제하고 패권을 행사할 것이므로 한국이 그 질서에 동참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 한국이 다시 부상하는 일본과 사실상 경제적으로 융합하는 길을 모색하는 게 가장 현명한 선택일 것이라고까지 단언한다. 요즘 어디서 많이 보이는 장면 같지 않은가? 자이한은 미국의 탐욕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2023년 1분기 동안 전 세계 전기자동차 판매는 30%가 늘었지만 지난해 IRA법으로 테슬라보다 비싸진 현대자동차 그룹은 ‘글로벌 톱 10’ 가운데 유일하게 판매가 줄었다. 지금 한국의 반도체 기업도 미국으로부터 보조금을 빌미로 미국 내 공장 이전과 프로세스 공개 등을 요구받고 있다.
반면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 4월 중국을 방문하면서 전략적 자주성을 강조하며 실리를 챙겼다. “동맹이라는 것은 속국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우리가 스스로 생각할 권리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2023년 4월 중국 방문 후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이 한 말이다. ‘미국 애완견’이라는 놀림을 받는 일본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미국의 살상용 무기 지원 요구를 거절하고 경제적 지원에 그쳤다. 143년 전 『조선책략』에서도 생존의 핵심은 맹목적 줄서기가 아닌 ‘세력균형’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4월 미국 방문에서 미국과 한국이 ‘한미첨단기술동맹’으로 진화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한국산 전기차에 대한 지원금 폐지, 미국 내 건설 중인 한국 반도체 기업들에 대한 압박 등에 대한 해결방안 발표는 없었다. 윤 대통령은 미 의회 연설에서 40여 차례 ‘자유’를 강조했지만, 중국 굴기에 대한 견제와 미국 내 일자리 창출에 열심인 미국은 레토릭으로서가 아닌 실제로 ‘자유’무역을 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별로 없다.
19세기 초 영국 총리를 두 번 역임한 파머스턴 경은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에겐 영원한 동맹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다. 우리의 이익은 영원하고 영원하며, 그 이익을 따르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한미정상회담에서 한국 기업들의 우려가 다루어지지 않았다고 보도한 것은 한국 언론이 아닌 미국 블룸버그 통신이었다. 정상회담 직후 기자회견에서 “중국에서의 반도체 칩 제조를 제한하는 것이 한국에 피해를 주고 있다. 중국과의 경쟁 때문에 한국이 피해를 받고 있다”고 따져 물은 것도 한국 기자가 아닌 미국 기자였다. 소(국익)는 누가 키워야 하나?
◇ 김석환 : 부산대학교 석좌교수 , 전 한국인터넷진흥원 원장, 전 knn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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