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청산에 살으리랏다」 ... 6학년 2반 삼총사

포토 에세이 통산 제 1046호(2020.7.28)

이득수 승인 2020.07.27 13:24 | 최종 수정 2020.07.27 13:44 의견 0
6학년 2반 반창회 칠순기념 소풍(왼쪽 세 번째 필자, 다섯 번째 죽은 김성해 일곱 번째 조경제)
6학년 2반 반창회 칠순기념 소풍(왼쪽 세 번째 필자, 다섯 번째 죽은 김성해, 일곱 번째 조경제)

예순여섯 말기암환자가 되어 공기 좋은 명촌리에 누운 어느 날 국민학교 반창 둘이 병문안을 왔다. 격일로 아파트경비를 하는 김성해란 친구와 가끔 일이 생기는 전기기술자 둘이 시간 맞추기가 어려워 간신히 왔다고 했다.

마침 아내가 부산에 볼일을 보러가고 없어 간단히 과일을 깎아 커피를 마신 뒤 나의 병세가 당장 위중한 정도가 아닌 것을 확인한 친구들이
“아직은 살았네. 바로 붙자.”
“주공아파트에서 쓰던 담요는 가져왔나?”

하며 금방 화투판에 않는 걸
“잠깐! 밭에 무거운 돌 하나 움직일 게 있는데 우리 그것부터 하고 놀자.”

하고 제가 제동을 걸자
“아 그거사 이따 식사시간에 잠깐 하지.”

하고 바로 게임에 들어갔습니다. 언양국민학교 49회 6학년 2반에서 통학거리가 젤 먼 조경제라는 아이는 동산이라는 산을 넘어 저수지를 돌아 단 3집이 사는 <세찌메>란 마을에 살았는데 젊어 전기기술자로 일했습니다. 또 한 사람 가장 키가 조그맣고 이목구비가 또록또록 인형처럼 잘 생긴 김성해란 친구는 제과기술을 배워 양과점을 하다 늙어 아파트경비원이 되었습니다.

졸업 후 우리 세 사람이 다시 만난 건 제가 부산에서 동사무소에 근무하며 야간대학고에 다니던 20세 때 보수동에서 우연히 자전거에 양과를 싣고 배달하던 성해씨를 만난 날로 이후 자갈치를 돌며 막걸리와 소주 같은 싼 술을 특별한 안주도 없이 마시다 입대했습니다. 그 후 한창 개발 중인 연산시장으로 이제 갓 스물의 처녀 하나와 같이 정구지전과 잡채를 파는 성해 씨와 제대 후 복직한 저도 결혼해서 마침 연산동으로 집을 사 이사 온 경제 씨까지 셋이 금방 한 무더기가 되었습니다. 

부산이란 거대도시 한 가운데서 시골국민학교 반창 셋이 바로 이웃에 사는 기막힌 행운을 잡은 것입니다. 주말마다 만나 술을 마시고 고스톱을 치고 놀다 거의 동시에 태어난 세 집의 아이들도 잘 어울렸습니다.

우리 집을 방문해 생애 마지막 고스톱을 치는 모습
우리 집을 방문해 생애 마지막 고스톱을 치는 모습

그렇게 주말마다 만나고 아이들끼리 씨름도 시키면서 나이가 들어 쉰에 접어들자 단짝 세 사람의 처지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양과점 하는 친구는 밀가루알레르기가 생겨 가뜩이나 고생하는 판에 파리바께뜨 같은 유명메이커가 몰려오면서 졸지에 매출이 떨어진 <골목빵집>으로 전락합니다.    당시에 대학생이 셋에다 하나가 피아노를 전공해 엄청 돈이 들 때라 아이들이 공부를 마칠 때쯤 그는 수영종점의 양과점을 정리하고 덕계신도시의 조그만 아파트로 이사 가서 막 썰어 파는 횟집의 종업원으로 일하다 마침내 아파트경비원이 되면서 한 달에 200만원이 좀 안 되는 돈벌이에 너무나 만족했습니다. 종업원 20명의 전기회사 공장장이던 친구는 사업이 자꾸만 위축되어 서녀명이 남을 때까지 버티다 나와 가끔 알바로 일을 띠는 정도가 되고....

그런데 젊을 때 박봉이라 제일 못 살던 제가 사무관이 되고 시집을 출판해 저들의 말로는 한 가닥 하는 사람이 된 데 비해 양과점친구는 자꾸 장사가 위축되어 생계가 힘들어지고 전기기술자친구도 젊을 때는 번듯한 2층집을 가졌는데 그 집 가치가 점점 떨어져 이제 아파트에도 못 미치고. 그래서 술자리에서 가끔 정부와 대통령의 이야기가 나오면 제가 앞에 있는 것도 잊고 공무원은 모두 도둑놈이라고 핏대를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너거 사업하는 두 사람도 시대의 변화에 적응해야지 매일 그 자리에 가만있으니 그렇지 않나 말하자 그만 분위기가 더 험악해졌습니다. 그렇지만 고추친구라 고스톱은 여전히 치면서...

지금 생각해보니 코흘리개로 큰 고추친구라면 쉰이 되든 예순이 되든 여전히 생활수준이 비슷하게 발전해야 하는데 어쩌다 도로 형편이 어려운 친구는 괜히 잘 나가는 친구가 부럽고 샘이 나는 것 같았습니다. 세상에 고추친구에 대한 자존심이나 질투심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는 모양으로 같았습니다. 70이 되어도 죽마지우로 지낸다는 것은 그 긴 세월, 그 많은 갈등을 겪으며 누군가 조금씩 양보하고 서로 합의해 이루어진 일로 아마 현대의 대도시에서 우리 셋처럼 60대 중반까지 40년이나 셋이 함께 붙어서 산 경우는 거의 없을 겁니다.

1년에 한 두 번 모이는 동창회도 자동차 하나로 가고 오고가 원스톱이니 얼마나 편리한지 한 서른 명 나오는 반창들이 하나 같이 부러워했습니다. 그리고 한 친구가 양산 덕계로 이사를 간 뒤에는 이제 판이 끝나면 가져가는 것이 아니고 딴 돈의 절반을 도로 돌려주는 고스톱으로 규칙을 바꿔서 연산동에서 둘이 올라가거나 덕계에서 혼자 내려오거나 거의 매주 빠지지 않고 게임을 했으니 세 부인네들도 세상에 그렇게 행복한 친구들은 없어 보인다고 했습니다.

이득수

고스톱 멤버를 소개하다 이야기가 길었습니다. 그날 우리누님이 슬쩍 와보다 사람이 온 것도 모르는 세 사람이 종일 고스톱을 치다 오후 네 시경에 라면을 삶아 먹고 저녁 열 시까지 또 고스톱을 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스톱 삼국지가 무너졌습니다. 그 후로도 두어 번 더 저를 문병하러 오던 양과점 하던 친구가 췌장암에 걸린 것이었습니다. 너무 여러 장기에 전이 되어 수술을 포기한 친구를 위해 저와 전기일 하던 친구가 같이 문병을 가서 간신히 고스톱 한 시간을 치고 돌아온 한 달 뒤 마지막으로 우리 집에 한 번만 더 오고 싶다는 친구의 부탁이 있어 누님집 토종닭을 삶았습니다. 그리고는 전기일 하는 친구와 셋이 닭백숙을 먹으며 또 한 참을 놀랬는데 지금 그 하나가 떠나고 만 것입니다.<계속>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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