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일흔 한 살의 동화(童話)」 (28)봄은 오고 있는가?

말년일기 제1229호(2021.1.28)

이득수 승인 2021.01.27 19:26 | 최종 수정 2021.01.29 10:29 의견 0
내년 봄의 새순과 매화꽃과 매실을 설계하느라고 수피가 자주색으로 투명해진 매실 나무 가지.
내년 봄의 새순과 매화꽃과 매실을 설계하느라고 수피가 자주색으로 투명해진 매실나무 가지.

갑갑해서 우리집에 마실을 온 누님이 오늘은 날씨가 봄 날씨 같다고 해서 점심을 먹은 뒤 모처럼 산책을 나서기로 했습니다. 

겨우내 입고 뒹구는 추리닝을 벗고 제대로 된 바지와 잠바를 입고 현관에 나서자 마초가 색다른 차림에 오늘은 정말 야외로 산책을 나가는가 싶은지 신이 나서 폴짝폴짝 뛰더니 잔디밭에 등을 대고 누워 한참이나 네 발을 버둥거리며 기뻐했습니다. 

체력이 떨어진 지난가을부터는 가끔 가는 산택을 주로 평지인 고래뜰을 걷다 피로하면 어디서든 돌아오곤 했는데 오늘은 지난 가을에 한 번 가보고 못 가본 골안못이 몹시 궁금해 바들뜰을 가로질러 오솔길 입구인 도명사 앞까지 올라가는데도 숨이 가빠 한참을 쉬면서 아직 겨울의 한가운데인 1월 하순에 느낄 수 있는 봄의 기미(機微, 기미는 임금의 수라를 미각이 뛰어난 기미상궁이 조심스레 그 맛과 재료의 안정성을 살피는, 아주 작은 조짐을 찾아낸다는 말)를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먼저 제 눈에 들어온 것은 아주 옅은 자주빛이 은은하게 배어나오는 매실나무가지였습니다. 여러분은 아시는지 모르지만 11월 말 낙엽이 지는 모든 활엽수는 12월 한 달, 그 모진 추위 속에서 이듬해의 생활설계를 하는데 매실, 떡갈나무, 산딸기나무와 복분자, 굴밤나무들은 대부분 어둡고 진한 회색이나 진한 갈색의 묵은 가지를 겨울바람에 맡겨 수도 없이 나부끼면서 다가올 한해를 설계하며 그 희망으로 수피(樹皮)가 조금씩 투명해지는데 굴밤나무 종류는 그 어두운 회색의 수피가 차츰 투명한 초록으로 바뀌어 3월 말쯤이면 조그맣고 귀여운 연두 빛 새순을 피워냅니다.

6개월 만의 영역 순찰에 부지런히 이상 여부를 체크하는 마초

또 매실이나 산딸기나무는 어주 연해 흐늘거릴 것만 같은 연자주 빛 수피에 살그머니 자수색 새순을 피우고요. 그런 모든 활엽수 중에서 빨리 봄을 반응하는 저 매실나무가지는 벌써 금방 돋아날 자주색 새순과 얼음보다 더 차갑고 눈보다 더 하얀 배화 꽃을 피워낼 것이고 이어 3, 4월에 벌나비가 나와 충매가 이루어지면 새파란 매실나무 열매를 매달 모든 설계가 끝나 지금 그 설계도의 첫 페이지를 열고 있는 것입니다.

골안못의 빙판이 녹아 흐르는 물에 잠긴 앞산의 능선

길이 400m, 경사도15도의 골안못 가는 오솔길을 오르다 하도 숨이 차서 여러 번 쉬기를 반복하며 그냥 돌아갈까 망설이다 자신이 여기서 좌절하면 다시 투병할 기세가 꺾인다는 생각에 모진 마음으로 기어이 경사로를 오르자 언제 봐도 시원하고 반듯한 못둑이 오랜만에 오는 저는 물론 벌써 겅중겅중 뛰는 마초를 반겼습니다. 그렇지만 마초는 마초대로 그들과 인사할 틈도 없이 무려 6개월만에 찾아온 자기의 영역 제 관할의 솔보대기나 억새뿌리에 무슨 변화가 없는지 연신 냄새를 맡아 확인을 하느라 여념이 없더니 마침내 탐색을 끝내고 순환도로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누렇게 퇴색한 억새가 나부끼는 못 둑길 바람에 날아와 자리 잡은 작은 솔보대기와 오리나무가지 끝에도 봄은 어김없이 가벼운 조짐(兆朕)을 매달이 늙은 산골노인이 얇은 미소를 때기에 웃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끝없는 그리움 오리나무의 묵은 열매와 긴긴 기다림 초록색 새 열매

못둑 길을 한참 걸어 중간에 이르자 입구 쪽에는 아직 꽁꽁 얼었던 빙판이 조금 녹아 마치 흰곰이 뛰어노는 북극처럼 빙판사이로 새파란 도랑이 흘러가고 그 도랑 속에 앞산 명일봉의 그림자가 잠겨 그림 같은 선경을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세번 째 사진을 자세히 보면 빙판가운데의 산 능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호수를 한 바퀴 빙 돌아 다시 수문께로 다가올 무렵 눈에 익은 오리목나무 가지 하나가 다가와 얼른 사진을 찍었습니다. 유난히 추웠다는 그 모진 지난겨울의 강추위 속에서 제가 늘 <그리움>이라고 부르는 새까맣고 큰 묵은 열매들이 <가다림>이라고 부르는 강추위에 새파랗게 언 작은 열매를 감싸고 이제 곧 봄바람이 불 것이라고, 그리고 저 못둑 건너 양지쪽 언덕에 진달래가 필 것이라고 다독이고 있었습니다.

平理 이득수 시인
平理 이득수 시인

◇이득수 시인은

▷1970년 동아문학상 소설 당선
▷1994년 『문예시대』 시 당선
▷시집 《끈질긴 사랑의 노래》 《꿈꾸는 율도국》 《비오는 날의 연가》 등
▷포토 에세이집 『달팽이와 부츠』 『꿈꾸는 시인은 죽지 않는다』 등
▷장편소설 「장보고의 바다」(2018년 해양문학상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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