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수 시인의 「일흔 한 살의 동화(童話)」 - (51)분재(盆栽)와 전정(剪定)
이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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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0 08:10 | 최종 수정 2021.02.21 0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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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은 묵힌 지 한 3년쯤 되는 사과밭입니다. 원래는 제 친구형인 아주 노련한 농부 김정수(78)씨가 거름과 효소는 물론 어떤 때는 자기 마시던 수주까지 살포해서 언양일대에스는 제일 당도가 높과 감칠 맛이 있는 <가지산꿀사과>를 생산했는데 다리에 힘이 빠져 운영이 어려워 팔아버렸는데 새 지주(地主)가 농사경험이 없어 사과의 단맛도 떨어지고 식감도 거칠어 개점휴업상태로 그 소문난 사과나무들이 속절없이 늙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앞길을 한번씩 산책하는 저는 그 달고 시원한 사과가 사라진 것보다 사람이 어떻게 제 먹기 좋은 사과를 보다 많이 열고 보다 따기 쉽게 저렇게도 심하게 수형을 우그려뜨려 사람이라면 중증장애인으로 만들어놓았느냐 하는 점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저 과수원의 주인도 처자식이 있을 텐데 똑똑하고 착한 자손들이 태어라라고 아이들의 손발고 어깨를 비틀고 경우에 따라서는 손가락이나 발을 잘라내기도 하고 양팔을 잘라버린다면 말입니다.
과일나무의 잔가지를 미리 잘라 관리와 수확에 편리하도록 저렿게 수형을 비트는 전정(剪定)은 농업의 신 테미테르나 목양(牧羊)의 신 판이 보면 화가 끝까지 치밀어 당장 과수원의 주인을 지옥불에 던져버릴 만큼 잔인하고 악랄할 행위입니다. 사람이나 사과나무나 다 같은 지구가족으로서 나름대로의 살아가는 터전과 소출이 있고 그 역할이 있기 마련인데 누가 무슨 권리로 다른 생명체의 외형을 주렇게 험악하게 훼손시키는 걸까요? 생각할수록 치가 떨리는 일이 우리가 어릴 적 진장이라는 앞산에 복숭아과수원이 있었는데 거기 주인 조두천(여의도순복음조용기목사 생부)는 이른 봄 비틀어지거가 웃자란 복숭아가지 일부를 전정가위로 자르고 유황을 분사함으로서 농사준비를 마쳤습니다. 또 마당에 높이 20m, 폭 20m 정도의 거대한 청사과(품종 명 인도(印度)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절대로 전정을 하지 않고 수확철이 되면 20미터가 되는 장대끝에 주머니를 달고 한 알 한 알을 따 모았는데 당시 언양은 물론 부산의 해운업계에 까지 큰 손으로 알려진 그 점잖은 사장님은 절대로 욕심을 부리거나 수목을 핍박하지 않았답니다.
그러나 전정은 호사가들이 하는 분재에 비하면 약과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환경이 안 좋아 영양이 부실하고 가지를 뻗을 부분에 바위가 있어 웅크리며 자란 기형의 나무를 가엾게 생각하기는커녕 무슨 큰 볼거리라고 거기에 수형을 잡느라고 그 부실한 나무의 가지나 뿌리의 일부를 자르거나 철사로 온몸을 포박(捕縛)하여 수형은 낸다고 굿을 벌이다 자신도 한 생명체로서 지구가족으로서 저렇게 다른 생명체를 핍박한 비이성적, 동물적 패악을 부린 자가 그 고난에 찌든 생명체(분재)들을 감상한다고 취미크럽을 만들고 전시회를 하고 심지어 고가의 경매를 하여 투기의 대상으로 한다니 참 기가 막힙니다. 생각해보세요. 만약 성격이 좀 고약한 신이 있어 저 분재나 수석수집가의 아들딸을 잡아다 척추를 분질러 허리를 굽게 하고 얼굴에 온갖 흉터를 가득하게 하여 전시회나 경매시장을 연다면 저 분재가가 꼼짝도 하지 못 하고 그 과정을 끝까지 지켜보아야 한다면 말입니다.
지난 세기말 우리에게 다가온 삶과 죽음과 영혼에 대한 석학이자 길잡이인 프랑스의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개미의 작가)는 소설에서 무슨 연유로 그렇게 악질적인 인간이 태어나는 건지 모르지만 어떤 명분도 이유도 명분도 없이 단지 나치의 광기(狂氣)로 세계제2차대정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을 죽게하고 유태인을 가스실로 몰아넣어 한 종족의 절멸을 획책한 <히틀러> 같은 자가 죽으면 분재용 나무가 된다고 했는데 그 참 맞는 말입니다. 히틀러나 무솔리니라면 분재도 보통분재가 아닌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분재가 되어야지요. 요 근래 입양아가 귀찮다고 무자비하게 폭력을 휘둘러 갈비뼈가 부러져 죽게 하는 사람들도 그렇고.
두 번째 사진은 한 70, 80년 된 늙은 최초의 동백나무 분재가가 늙어 여기저기로 넘어오다 마침내 우리 명촌별서로 들어온 것을 오자말자 한 뭉텅이의 철사줄을 끊고 억지로 싸맨 가지를 풀어 완전한 자유상태로 돌려 선체로 5년이상 비바람을 맞고 많이 회복된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긴 분재생활의 후유증으로 저 동백은 좀체 키를 키울 생각을 못 하고 꽃 송이도 여남은 개 간신히 피웁니다. 한번도 외고 펴고 살았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요.
근래 <6시 내고향>, 이나 <사노라면>등의 농촌프로그램을 보면 과수나 딸기농가에서 일상으로 당도(糖度)계를 놓고 단맛이 몇 브릭스니 경쟁적으로 이상한 약품(천연약품도 있지만 화학약품도 없지 않음)을 살포해 과연 저 달디한 과일을 우리가 마음놓고 먹어도 될까 걱정이 될 때가 많습니다. 달기로만 치면 우리에겐 설탕이 있고 꿀이 있고 조청이 있더 굳이 저렇게 당도계로 재어가며 과일을 생산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의 과일은 그 고장의 토질과 바람과 기후와 농부의 정성이 빚어낸 하나의 최고급 예술품, 가장 맛있는 과일아란 가장 단 과일이 아니고 당도와 신선도, 싱그러운 맛, 새로운 미각으로 분류된 <감칠맛>과 곱게 익는 빛깔이 어우러진 것일 것입니다. 이제 당도계가 아니라 싱그러움을 측정하는 기가가 발명되어 그걸 농장과 과수원과 마트에서 일일이 체크하여 사고파는 그런 시대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시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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