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철의 문화칼럼] 근대 장편 애니메이션의 시작으로 보는 ‘상상력’의 문제

강희철 승인 2020.02.01 21:59 | 최종 수정 2020.04.11 15:25 의견 0

먼저 애니메이션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상상력’의 문제를 먼저 짚고 넘어가려 한다. 쉽게 예를 들어 상상력은 적어도 우리가 살고 있는 어떠한 구조적 문제를 성찰하거나 그 밖까지 사유하려는 실천적인 생각이라 규정하는 것이 이야기를 풀어가는 데 도움이 될 거 같다. 사전적 개념처럼 단순히 경험하지 않은 현상이나 사물을 그냥 그려보는 것으로는 누구나 하는 것의 문제이기 때문에, 아이에서 어른까지 누구나 시도해 볼 수 있는 상상력 실험은 누구나 하는 것이고, 앞으로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의 삶을 제어하는 수많은 담론들과 이론, 법, 도덕 등 이미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진 규칙에서부터, 자신이라고 오인하는 ‘자아(심리학적 의미로서의 대상화된 나)’의 문제까지 그 수많은 구조적 틀 안에서 상상력에 한계성이란 것이 부여되기 마련이다. 특히나 우리나라는 ‘과학’과 ‘경제’의 발전을 맹목적으로 갈구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그 발전적 위상이 두드러지기에 뛰어나게 미래의 상상력에 대한 가치투자만 앞으로도 제대로 이뤄지면 그 도약은 계속되리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명백히 우리 삶의 문제들을 관찰하지 못한 오인 속에서 비롯된 너무나 긍정적인 추론이다.

이는 다양한 관점에서 고찰될 수 있는 문제겠지만, 필자는 대중문화, 그 중에서도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많았기에 근대 초기에 경쟁적으로 촉발된 근대 장편애니메이션 제작의 역사를 통해 우리나라 근대 초기의 상상력의 문제를 같이 고찰해 보려 한다.

아시아의 한·중·일 중심으로 최초의 애니메이션을 간단히 살필 수 있겠는데, 이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장편 애니메이션은 디즈니의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1937), 환타지아(1940) 등이 있다. 당시 흑백이 아닌 총 천연색의 이미지로 극장가를 장악한 이 애니메이션들이 많은 대중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이후 그림 이미지를 마치 살아있는 영상처럼 표현하는 창작기술에 크게 매료되게 된다.

이후 일본에서는 모모타로와 바다의 신병(1945)-소실되어 발견되지 않는 1943년작 모모타로의 바다 독수리가 최초라고도 한다-있었는데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연관된 영화이기에 최초의 상업적 장편 애니메이션은 백사전(1958)으로 보고 있다. 중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발표한 흑백 장편 애니메이션 철선공주(1941)가 있고, 우리나라는 1945년 국가의 주권을 찾은 이후 첫 칼라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1967)을 내놓았다.

이렇게 첫 장편 애니메이션의 시작을 거론하면서, 주목하게 된 것은 중국은 장편의 고전소설 ‘서유기’에서 부분적인 서사를 가지고 와서 ‘철선공주’라는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한국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에 주목해 ‘홍길동’이라는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는데, 일본이 최초로 상업적인 애니메이션으로 내세운 ‘백사전’은 일본의 고전이나 근대 소설이 아닌 중국의 4대 민간설화에 속하는 ‘백사전’을 내세웠다는 사실이다.

국가주의 이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던 한·중·일의 상황에서 첫 애니메이션을 자신의 국가 안에서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유독 일본 애니메이션만은 자국의 이야기가 아닌 것에서 출발 할 수 있었다. 그것도 서로 갈등의 상황이었던 중국의 고전설화를 애니메이션의 서사로 채택했다. 이렇게 국가주의를 넘어서는 선택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이 하는 작업을 아시아에서 구현하겠다는 일본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결과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상상력에 제약을 가지지 않기 위해서는 아시아인을 넘어서 세계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서사전략을 고민해야 하기에, 미국의 디즈니가 유럽의 민간설화를 모은 그림형제의 동화 ‘백설공주’에서, 인간이 아닌 다양한 동물(쥐, 오리, 개 등의 캐릭터)에서 장편 애니메이션의 시작을 알린 것과 같은 폭 넓은 고민이 필요했다.

천년이 넘은 하얀 뱀(백사)이 변신한 처녀와 나무꾼 총각의 이룰 수 없는 사랑 이야기가 국적을 넘은 감동을 줄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에, 자신의 나라 밖의 이야기라도 일본은 최초의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에 ‘백사전’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었을 것이다.

국가 간의 갈등과 지역 간의 갈등은 사실 이기주의에 가까울 뿐이며, 시작은 곧 자신의 발판아래서 도약한 결과라고 한계지어 생각하는 결과일 수가 있다. 꼭 이렇게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우리의 상상력을 묶을 수 있는 것이다. ‘열려’ 있다는 것은 이렇게 스스로 한계치를 설정하지 않으면서, 이미 설정한 관계를 벗어나려는 도약을 준비하는 사이에 있다는 뜻으로 생각된다.

강희철

이제야 조금 ‘과학’과 ‘경제’가 발전한다는 상상력에 대해 비판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과학과 경제 발전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 금기시 된 근대초기에 우리나라에서 SF소설이 많이 번역되어 출간되기 어려웠다. 물론 다양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은 출간될 수 있었지만, 과학의 발전이 무서운 재앙을 낳는다는 등의 스토리들은 번안되기가 어려웠다. 마치 ‘핵’에 대해 비판적인 서사를 하면 너 자신도 편리하게 전기를 쓰면서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냐고 하는 것처럼, 과학에 대한 과한 부정성은 우리의 상상력에서 많이 결여되어 있다.

경제 또한 마찬가지다. 신자유주의가 추구하는 물물교환의 전 지구적 보편화가 당연하다는 생각 거기에 경쟁적으로 대응해서 발전해야 한다는 식의 국가 경쟁논리 안에서 우리가 이기는 것이 급선무이지 복지와 인권 문제에 할당할 ‘자본’은 없다는 식의 논리가 이제 나이까지도 계급화하고 있다. 보편적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복지정책을 하더라도, 특정 나이에 투자를 하게 되면 모든 것이 부당한 차별적 복지로 오인된다.

상상력의 결핍문제는 적대하고 혐오하는 것만이 비판이 된 현실에 있다. 지금 동아시아의 상황은 국가주의 안에서 그 적대성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조금만 여유가 있다면 유럽의 유로화처럼 동아시아 안에서 쓰일 수 있는 화폐의 통일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남·북한 통일도 더 자유로운 가능성에 입각해야 하는데, 근본적으로 적대성을 풀 수 없는 통합가능성만을 논의하고 있는 점이 많다. 우리의 상상력에 제약이 없는지 고민해야 한다. 거기에서 잘못된 관행이나 제도가 변혁될 실천이 생성되고, 우리가 새로운 실천을 감행할 다양한 상상력들이 펼쳐진다.

<문학평론가>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