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철 문화칼럼] 분노하는 주체'들'을 위하여

강희철 승인 2020.06.05 20:29 | 최종 수정 2020.06.05 21:13 의견 0
[사진=픽사베이]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아’라는 것을 알기 쉽게 말하면 ‘대상화된 나’이다. 그래서 심리학에서는 주체의 형성과정에서 거울단계를 통해 자신을 오인하고 대상화된 나를 주체라고 받아들이게 된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주체라는 것은 어쩌면 계속 운동하고 있는 인간의 욕망과 의지 그 자체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한 에너지를 통해 자신의 ‘자아’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닌 존재로 산다는 것, 그것이 실존적 의미의 인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실존주의자 중 한 명이었던 장 폴 사르트르는 소설 『구토』(1938)의 로캉탱이라는 지식인을 통해 자신의 허상적 자아를 부수는 과정의 힘듦을 ‘구토’로 표현하게 되는데, 재미있는 것은 그러한 깨달음을 자신이 조약돌을 만지는 것이 아니라 조약돌이 자신을 만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사물과의 관계에 종속되어 있던 ‘자아’의 허상을 깨닫자 곧바로 신이 없는 고독한 홀로 있음의 비루한 자신의 존재, 실존주의 적으로는 기투(企投)된 존재의 의미를 성찰하게 되면서 그는 계속된 사물들과의 만남 앞에서 구토를 경험하게 된다.

이렇게 단순히 지식인으로서 안정적인 삶을 살다가 스스로 주체성인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수많은 불안, 공포 , 죽음 등과 대면하는 것으로 자신의 울타리(자아)를 벗어나는 너무나 힘겨운 과정이다. 그렇기에 사르트르는 이러한 과정을 지식인의 입장에서 ‘구토’한다고 적절한 비유방식을 만들었을 것이다.

지금은 1938년을 넘어 2020년을 마주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지식인이라고 해서, 특별히 삶의 감각이 예리하거나 민감하다고 가정할 수 없다. 그것은 근대초기의 모더니즘적 사고방식 안에서 가능했던 지식인의 우월적인 ‘감각’이었다. 이상이 「날개」(1968)란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날개’를 가졌었다고 가정했던 그러한 감각과 가까울 것이라 생각될 뿐인데, 그 예민한 감각조차 그림자와 자신이 일치하는 ‘정오’의 시간에 싸이렌 소리와 함께 잠시 향수하는 정도가 소설의 마지막 결말이었다.

이제 2020년의 현실에서 이런 모더니즘적 사고관에 기초한 예민하고 초월적인 감각을 향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지금은 홀로 있음의 적막함만큼이나 모두가 함께하고 있음을 초월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도구들이 주변에 널려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요즘 TV를 보면 가수들이 무대가 아니라 무대벽면이나 랜선(온라인)으로 이어진 모니터의 관객들과 대면하며 감동적인 노래를 부르는 이전과 다른 ‘사건’을 마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야구장에 선수들이 마치 관객이 있는 것처럼 시합을 하고, 우리는 야구장에 있는 것처럼 스포츠를 TV를 통해 관람한다.

우리는 홀로 기투된 것이 아니라, 함께 기투된 존재라는 것을 조금 더 깨닫게 된다면, 과거에 기대있던 홀로 있음의 고약한 구토증세를 넘어 홀로가 아닌 ‘같이’ 분노하고 기뻐하는 주체들의 의미를 깨닫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종차별에 의한 이 혼란스런 상황도 사실 함께 기뻐하고 분노하고 있는 주체들이 있음을 보여주는 ‘실존’의 과정이다. 법적으로 정당한가, 아무리 당한 자의 입장이라지만 폭력이 정당한가를 묻기 전에 우리가 함께 ‘분노’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정당한가를 되물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이제 홀로 저항하고 분노해봤자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무력감 앞에 계속해서 안주할 수 있는 삶만을 찾아왔다. 여기에서 탈주하는 길은 함께 분노할 수 있는 감각을 키우는 것이다. 마치 소리만 들으면 모든 좀비들이 달려와 인간을 물어뜯는 것처럼 말이다.

강희철

우리나라 영화에서도 잘 사용되고 있는 좀비라는 캐릭터는 이제 너무나 빨라지고 너무나 영리해졌다. 왜냐하면 타자들의 입장에서 성찰할 수 있다면 좀비들은 ‘분노하는 주체들’로 볼 수 있지만, 권력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권력적 시스템을 호시탐탐 무너뜨리려고만 하는 시민의식이 없는 규범 일탈자들로만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간이 아니라 좀비 그 자체라는 사실이 감각적으로 다가온다면 그것 또한 ‘구토’의 이유가 되겠지만, 그러한 예민한 감각보다 우리가 함께 같은 것을 바라보며 분노하거나 열망할 수 있는 주체이기에 ‘좀비되기’ 또한 우리가 해야 할 실천의 전략으로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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