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철의 문화칼럼] 개인의 자유에 대해 ‘코로나19’가 보내는 메시지

인저리타임 승인 2020.08.02 18:42 | 최종 수정 2020.08.02 19:08 의견 0
[픽사베이]

2003년 중국 광둥성 광저우의 한 병원에서 발병한 사스를 치료했던 의사가 홍콩에 가게 되면서 2차 집단발병을 일으킨 사스(SARS)는 Amoy Gardens(淘大花園) 아파트에서 심각한 전염력을 보여준다. 사스 증상을 보인 남성이 이 아파트에 사는 동생집 화장실을 사용한 뒤 단지 내 321명을 감염시키고, 이 중에 42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이때 전염의 원인으로 분석된 것이 하수도관을 옮겨 다니는 바퀴벌레, 아파트 입주자가 키우는 고양이, 시궁창을 쉽게 돌아다니는 쥐 등이었으며, 이후 감염자의 대소변이나 감염자의 침이 공기 중에 비말로 퍼져 사스가 확산되었다는 것이 홍콩 집단감염의 원인으로 분석되기도 했다.

2019년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도 이와 똑같이 질병을 가질 만한 동물이나 곤충에 대한 추측에서 그 발병원인을 생각하다가 사람들 사이의 감염경로에 대한 추적을 하면서, 비말 감염이 가장 큰 문제로 인식하고 각 나라의 보건당국은 마스크 쓰기나 사회적 거리두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확정지을 수 없는 사스나 코로나19의 발병원인을 추정하는 것보다 이미 확산되고 있는 바이러스를 차단하는 방법이나 치료할 수 백신을 만들어 내는 것이 급선무란 사실을 모두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바이러스의 무서움은 실제 인체에 전염이 되었으나 무증상자로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이고, 바이러스가 비말의 형태로 옷, 종이박스, 플라스틱, 금속 등 우리가 쓰는 물건들에 묻었을 때 옷이나 종이박스에서는 24시간, 플라스틱이나 스테인리스의 표면에서는 2~3일 간 생존가능하다고 한다. 공기 중의 작은 입자들 속에서도 최대 3시간 동안 지속가능한 생존력을 보인다.

생각보다 오랜 생존기간을 가지고, 사람들 사이에서 눈, 코, 입을 통해 쉽게 전염될 수 있기에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 바이러스를 옮기지 못할 만큼의 장치(마스크)와 거리두기가 필요한 것이고 물건을 만지던 자신의 손이 가장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눈, 코, 입을 자주 만지기에 손 씻기가 하루 일과 중 가장 정성들여 많이 해야 하는 행동지침이 된다.

이러한 자세한 상황을 알면서도, 사회적 거리두기와 마스크 쓰기를 무시하는 가장 큰 나라가 미국이다. 그리고 그렇게 보건당국의 지침을 무시하는 가장 큰 이유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는 논리인데, 개인의 자유가 ‘국가’라는 울타리 밖에서는 ‘가능’이 아니라 ‘기능’조차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잘못된 전염력만 강한 ‘코로나19’와 다를 바 없는 사고방식이다.

바이러스는 알다시피 일반적인 생명체와 다르게, 특정한 상황에서만 ‘의식’있는 생명체가 되는 기이한 존재다. 의식 있는 생명체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숙주가 필요하며, 이 숙주에 의해 빠르고 강한 증식력을 가진다. 국가 공동체와 지역 공동체가 우리의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숙주라면 우리는 그 안에서 빠르고 강한 증식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의식’ 있는 존재가 되었다. 우리의 의식이라는 것이 마치 바이러스처럼 어떤 체계 안에서 발현될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개인의 ‘무한한’ 자유라는 것이 얼마나 쓸모없이 전염성만 강한 이기적인 생각인지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와 반대로 국가나 지역공동체가 우리 삶의 숙주가 되어야 할 것들인데, 역으로 감시나 권력의 체제로 변모했을 때, 그 속에 사는 개개인들이 얼마나 쉽게 나쁜 방식으로만 증식되는지도 가늠할 수 있어야 한다.

‘개인과 자유’로만 자신을 바라보는 오염된 바이러스와 같은 서양의 시각은 한국의 코로나19 대처방식을 그들만의 독특한 공동체적 의식으로 보게 한다. 예를 들어 군대문화, 조직문화, 유교문화 등 ‘구속’에 익숙했던 지점 안에서 그들만의 대처방식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와 다를지도 모른다. 미국은 그들의 오래된 투쟁을 통해 위대한 나라를 만들었던 경험이 있지만, 우리는 아직도 역사적으로 위대했던 ‘국가’라는 것을 되찾고 있는 중이고, 아직도 통일되지도 못한 반쪽의 나라인 지점에서 우리는 아직 우리가 만들어갈 국가의 ‘위대함’을 구축하고 있는 중이다. 공동체가 당연히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나라의 윤리의식과 공동체를 일구면서 성찰해야 할 나라의 윤리의식은 닮을 수 없다.

강희철

그런 점에서 안정적이고 부유한 나라들이 코로나19를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모습은 안타깝다. 공동체는 잘못된 제도를 개선하고 잘못된 의식들을 개선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은 바이러스적인 존재에서 스스로의 성찰이 가능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 아직도 소설이나 영화가 주는 메시지 안에서 인간을 ‘개와 돼지’라는 가축으로 묘사하는 것은 개선할 수도 개선될 여지도 없는 사회가 우리를 그러한 전염되고 잘못된 인간 이하의 상태로 살아감을 가축으로 비유하게 만드는 것이다.

코로나19는 이렇게 우리가 잘못된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안에 휩싸이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다. 우리가 새롭게 구축해야 할 것들에 관심을 갖고 국가의 정치적 문제들에 깊숙이 개입하지 않는 한 우리는 인간이 아닌 ‘바이러스’로 존재적 성찰을 할 뿐이기에.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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