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철의 문화칼럼] 코로나19가 보여주는 자본주의적 삶의 피폐함

강희철 승인 2020.03.01 14:15 | 최종 수정 2020.03.01 14:38 의견 0
[픽사베이]

#. 아이돌 문화와 코로나 바이러스

아이돌(Idol)은 알디시피 우상(偶像)를 뜻하는 철학적인 용어다. 이 우상이란 의미가 다른 방식으로 아이콘(Icon)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는데, 어떻든 이는 매혹적이어서 숭배될 수도 있는 어떤 강력한 이미지를 말한다. 이러한 이미지를 활용하는 방식은 종교에서부터 현재 기업이나 대중문화에 이르기까지 우리 삶 곳곳에 펼쳐져 있다. 예를 들어 지금의 신천지와 같은 종교단체, 삼성과 같은 기업단체, 대중문화를 이끌고 있는 다양한 아이돌그룹 등이 거의 신격화된 이미지가 되어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꿈을 꿀 수 있는 주체이며, 그 주체의 선택에 따라 세상을 조망하거나 조직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그러나 이 말을 조금만 전도시켜보면 우리의 삶은 권력의 주체에서 권력에서의 소외자로 금방 자신을 위치시킬 수 있게 된다. “인간은 권력에 의해 주체화되며, 권력적 시선에 따라 세상을 조망하거나 조직하는 방식이 달라진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스스로 조율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지금 창궐하고 있는 코로나19(코로나 바이러스)도 자연의 재해가 아니라 인간이 만든 재앙이다. 그 최초의 보균자가 인간이 아닌 박쥐라고 하더라도 박쥐로부터 인간에게의 ‘전염’이 우연적인 것이라면, 그 우연조차 인간이 적극적으로 만든 것이며, 이후 인간끼리의 전염상황을 봤을 때, 이는 명백하게 지금-여기의 우리 문화가 문제적이란 이야기가 된다.

유럽에서 페스트가 막대한 감염을 일으킨 문제도 기원전부터 있었던 질병으로 보이나, 특정시기에 유럽의 중요 ‘도시’에 창궐했다는 것은 감염이 쉬운 방식으로 삶을 조직한 인간의 문화에 있다. 정복하고 약탈하고, 노예화하는 권력적이고 패권적인 삶 안에서 안주하던 ‘부(富)’의 도시들이 페스트의 온상이 된 것은 ‘자본’이 쌓아올린 삶이 결국 인류의 삶이 나아갈 방향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와 닮아 있는 청소년들을 훈육하는 시스템으로 운영하고 있는 잘못된 아이돌 문화가 판치는 감염력, 잘못된 조직문화와 경제발전만 생각하는 신념 안에서 대기업들만 성장시키는 방식의 감염력, 잘못된 방식으로 교세를 확장하고 있는 종교단체들의 감염력을 등은 우리가 잘못된 우상을 비판하거나 그것을 새롭게 재편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바라보지 못한 결과이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적 삶이, 빠르고 효율적이며, 어디든지 쉽게 가고 쉽게 소비하는 삶이 만든 결과적 재앙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우리는 새로운 ‘도시’를 꿈꾸지 못하고 자본이 쉽게 흐르는, 자본에 의해 착취되는 도시적 삶을 ‘우상’화 해왔던 가를 반성해봐야 되지 않을까?

#. 포스트모던의 시대와 코로나 바이러스

앞서 페스트 이야기는 중세시대의 도시 중심의 감염력에 대한 이야기이며, 유럽이라는 공간 안에서 감염이 이뤄졌다는 문제라면, 지금 포스트모던의 시대에서 감염은 ‘전 지구적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도시’를 가진 국가들만의 전 지구적인 문제다. 다시 말하면 자본의 속도에 민감하지 않은 삶을 사는 어떤 부족이나 단체들에게는 이러한 감염의 공포에서 멀어져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포스트모던의 사회의 특징을 반영한다. 시공간의 압축된 경험을 하고, 탈경계의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삶을 제공하는 것은 과학기술과 자본의 힘이 만든 결과이다. 이러한 결과로 스펙터클의 사회가 만들어졌고, 문화적 경험 문제뿐만 아니라 실제로 도시를 사는 1인의 하루 생활권이 폭넓어졌다. 자본만 있다면 며칠 안에 어디든지 날아다닐 수 있게 구조화된 도시적 삶 안에서 우리는 ‘경계’를 세우는 데 아주 무감각해졌다. 이는 ‘신자유주의’적 사회의 특징이기도 하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만든 무시무시한 ‘음식’관련 이야기를 하자면, 우리가 먹는 음식을 생태적 피라미드 구조로 생각해 볼 때, 우리가 먹는 닭과 소, 돼지를 사육하는 문제를 돌이켜 볼 수 있다. 과거 중세이전에는 닭과 소, 돼지를 지역에서 생산되는 사료로 키웠다면, 이제는 특정 지역에서 유전자 조작으로 쉽게 많이 만들어낼 수 있는 옥수수 사료에 기대고 있다는 것이 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특징이다. 겉은 지역의 음식을 먹는 듯 하나 그 음식이 나에게 올 수 있는 기원을 전체적으로 조망해 보면 그것은 지역에서 생산한 음식으로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러한 무시무시한 구조를 그동안 무시하며, 빠르게 키워지고, 빠르게 사육되는 가축들을 전 지구적으로 쉽게 구할 수 있는 값싼 사료에 기대는 것을 당연히 여겨왔다. 신자유주의 경제는 쉽게 말해 전지구적 자본이 쉽게 교환될 수 있는 구조를 꿈꾼다. 이 꿈이 만일 당신의 꿈이라면, 이는 정말 ‘자신’의 꿈인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자본에 의해 훈육된 삶 안에서 빠름을 추구하는 것, 당장 효율적이면 그것이 최선이라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한국사회에 만연된 전염병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요즘 조현병 관련 기사나, 공황장애, 대인공포증 등 한국사회에 정신적 질병이 다른 때보다 많아지는 것도 이러한 자본의 속도에 민감하지 못하거나 이러한 속도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견디지 못하는 문제가 아닌지 정말 예민하게 우리의 삶을 주시하면서,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걸리는 질병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와 그 감염의 문제를 너무나 단순하고 폭력적으로 국가나 어떤 단체의 문제로 소환한다. 그것은 지구 전체의 ‘도시’적 삶의 문제이며, 자본주의의 효율성으로 최적화된 삶만 즐기게 된 우리 삶의 한 징후에 불과하다. 그러한 징후는 다양한 방식으로 문제화되어야 하며,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공포에 잠식되어 공포를 퇴치할 대상을 마치 우상처럼 그 역의 방식으로 ‘악마’화 하는 방식에 불과한 비이성의 태도에 그쳐서는 안 된다.

#. 상상적인 감염과 상상적인 공포에서 벗어나서

우리가 사랑을 할 때, 쳐다보기만 해도 행복해진다. 사랑도 감염의 형태로 보자면 상상적인 면모로도 사랑은 크게 진행된다. 아이가 어머니만 보더라도 안정감과 행복감을 느끼는 것처럼 좋아하는 대상이 바로 앞에 있는 행복감은 누구나 느껴본 경험일 것이다.

강희철
강희철

코로나 바이러스도 접촉만으로도 쉽게 감염되기에 사랑의 상상적 행복감과 다르게 무서운 상상적 공포를 만든다. 이 공포는 어쩔 수 없는 심리적 사실이지만, 우리는 상상적으로만 살아가지 않고, 상상적으로만 살 수도 없다.

이러한 감염이 단순한 재앙이 아니라는 것, 우리가 만든 삶의 문화 안에서 분명한 문제로서 들어난 어떤 ‘징후’라는 것으로 인식할 때 상상적인 것을 넘어 이것이 주는 상징성을 우리는 성찰할 수 있다. 이러한 상징성 안에서 우리가 인문학적인 성찰을 한다면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는 어떤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삶은 정신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피폐화되어 있고, 이를 돌보는 문제가 전 지구적 문제로 환원되는 아주 큰 상징구조 안에서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상을 받을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아주 큰 상징구조 안에서, 그 알레고리로서의 ‘기생충’은 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으로 전 세계인이 성찰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기생충이 ‘번역’이라는 틀 밖에서, 이미지를 통해 상징성의 교류를 이뤄낸 것처럼, 이 전 지구적 문제의 ‘코로나 바이러스’도 분명 상징적인 차원에서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할 것이다. 대상을 공포와 그 기원의 문제 안에서 폄하하고 배척하는 상상적 태도 안에서 우리는 도시 안에 영원히 갇혀 헤어나오지 못하는 ‘비주체적’인 인간이 될 뿐이기에.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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