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사태와 블랙스완

이상오 승인 2020.03.13 12:32 | 최종 수정 2020.03.13 12:57 의견 0
나탈리 포트만 주연의 영화 '블랙스완'(2010) 포스터.
나탈리 포트만 주연의 영화 '블랙스완'(2010) 포스터.

코로나19 사태를 '블랙스완 현상'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블랙스완' 현상은 17세기 말에 호주에서 검은 백조가 발견되면서 백조는 희다는 유럽 사람들의 통념을 깬 사건에서 처음 비롯되었다. 블랙스완이 제대로 유명해진 것은 레바논 출신의 미국 투자전문가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가 쓴 『블랙스완』 때문이다. 그는 ‘블랙스완’을 통해 국제금융위기와 증시 대폭락을 예측했다.

나심 탈레브의 ‘블랙스완’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조차 몰랐던 사건’, ‘극단적으로 충격이 큰 사건’, ‘예측은 불가능하고 나중에 돌이켜보고 설명할 수밖에 없는 사건’을 의미한다. 나심 텔레브는 세상의 변화는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 누적되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닥쳐오는 ‘블랙스완’을 예측하지 못해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블랙스완 현상’의 공통점은 당시에는 누구도 예측 못했으나, 지나고 보면 어디에선가 그걸 예측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사후에는 어떻게든 블랙스완 현상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문가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늘 예측가능성에 대한 환상에 빠지지만, 대부분은 블랙스완이 나타나고 나서야 그 현상을 해석하느라 바쁘다. 내 그럴 줄 알았다고...

신종 전염병의 출현도 구체적으로 예측할 수 없고 그 결과가 충격적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블랙스완 현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아무런 대책 없이 사람들이 죽어가고 돌이킬 수 없는 충격에 빠뜨렸던 과거와는 그 양상이 많이 달라졌다.

현대의학이 신종 전염병의 출현까지는 예측하지 못하더라도, 전염병이 발생한 후 진행경과나 그 결과에 대한 예측은 어느 정도까지 가능해졌다. 그럼으로 인해 사회 전체의 일상을 일시적으로 불편하게 하는 일은 일어나지만 세상을 바꿀 정도의 극단적인 사건으로까지는 잘 번지지 않는다.

아직 안심할 단계도 아니고 종식선언까지는 먼 이야기지만, 이 시점에서 우리나라에서 진행되고 있는 코로나19 사태를 복기해 보면, 누구도 예측 못하고 충격적으로 진전되어, ‘블랙스완’으로 부를 만한 사건이 있었다. 31번 환자의 출현과 그로부터 시작된 신천지의 집단감염 현상이다. 감염병 전문가들 중에는 애초부터 지역사회 확산이 불가피하다고 예측한 사람들도 있었으나 하나의 종교집단에서 급속도로 번지는 이런 식의 집단감염까지 예측하지는 못했다.

신천지 집단감염이 발견되기 전에 대통령이 코로나 조기종식을 언급한 걸 두고 비난하는 전문가들과 언론들이 있었는데, 그 누구도 종교집단을 통한 집단감염이 일어날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하지 못했다. 그 결과는 지금 우리가 겪는 현실 그대로다. 전형적인 블랙스완 현상이다. 과정이 충격적이고 결과를 예측하는 것도 섣부른 상황이 되었다.

신천지 발견 이후 방역당국은 사람들이 밀접하게 접촉할 수 있는 곳으로 의료기관, 종교시설, 요양시설에 집중하였으나, 새로운 집단 감염지로 떠오르는 곳이 콜센터다. 전국에 산재되어 있고 우리 일상에 더 깊숙이 들어와 있는 기업의 콜센터를 예측하지 못한 것도 우리가 얼마나 예측에 취약한 지 알 수 있는 장면이다.

블랙스완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준비할 수 없고, 결국 사건은 터지게 되어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스란히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는가.

『블랙스완』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나심 탈레브는 블랙스완에 대비하는 하나의 개념으로 ‘안티프래질 antifragile’을 제시한다.

프래질(fragile)은 깨지기 쉽다는 뜻의 취약성을 의미하는데, 그 사전적 반대개념으로는 강건함이나 견고함이 적합해 보인다. 그러나 나심 탈레브는 ‘강건하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완벽하게 강건한 것을 얻기란 불가능하므로 무작위적인 사건, 예상하지 못한 충격, 스트레스, 가변성으로부터 고통 받지 않고 오히려 이들을 활용해 시스템이 스스로 끊임없이 재생하는 메커니즘이 필요하다.’고 한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가 쓴 『블랙스완』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가 쓴 『블랙스완』의 국내 번역본.

직관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인데, 나심 탈레브는 지구 환경과 같이 자연을 유지하는 시스템을 전형적인 안티프래질로 설명한다.

‘대자연이 안전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대자연은 파기하고 대체하고 선별하고 개조하는 데 적극적이다. 무작위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강건하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길게 보면 무자비한 시간 앞에서는 가장 강건한 것이라도 모두 부서지게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는 40억 년 동안 자신의 모습을 유지해왔다.’

COVID-19의 팬데믹이 선언되고 이제 전 지구적인 사건으로 변모했다. 이미 각 국가들의 역량이 어느 정도 드러나고 있다. 중국은 이제 스스로 끝나가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지만 국가권력의 힘으로 거칠게 틀어 막은 데다가 여전히 통계를 신뢰할 수 없고, 미국은 최강국이지만 이런 식의 위기에는 거의 준비가 안 된 듯하고 리더십도 안정되지 못하다.

사망자가 급격히 늘고 있는 이탈리아는 선진국에 속하지만 6000만 국민들의 이동을 통제할 정도로 경직된 정책을 피하지 못했고, 이란은 통계도 방역도 모두 속수무책인 상황으로 보인다. 일본은 극도의 공포를 한국 때리기와 정신승리로 은폐하면서 어떻게든 자연 소멸하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은데 옆에서 보기에 몹시 불안하고, 아베의 실각이 멀지 않은 듯하다.

코로나19에 비교적 크게 노출되고 있는 국가들 거의가 블랙스완 현상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프래질한 태도와 정책을 선택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신천지’라는 극강의 블랙스완이 없었다면 어땠을까도 생각해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1개월 남짓을 돌아보면 ‘안티프래질’을 떠올리게 된다. 언론은 툭하면 뚫렸다고 했으나 방역체계는 여전히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고, 빠르고 유연한 대응으로 계속 여유를 만들어 가고 있다. 중국 같으면 이미 봉쇄되고도 남았을 TK지역과 다른 지역 간의 이동도 여실하고, 도시 내 사람들의 움직임은 조심스러우면서도 자유롭다.

역병이 심각해지면 유언비어가 난무하기 마련인데, 철저하고 투명한 공개로 인해 유언비어가 끼어들 여지를 없앴다. 생필품 사재기도 없고, 폭력적인 난동도 없다. 코로나19에 대해 대통령이 아는 사실과 국민들이 아는 사실이 다르지 않다. 극단주의자들과 보수 언론들이 여전히 가짜뉴스를 생산해내지만 그보다 더 강력한 외신들이 전례 없이 사실적이고 우호적인 기사로 덮어 버린다.

물론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결코 작지 않고 장기화할 경우 전망도 예측하기 어려우나, 머지않아 진정되는 지역에서 부터 서서히 새로운 피가 돌기 시작할 것이고, 대규모 정부 재정이 본격적으로 시장으로 풀리기 시작하면 좀 더 긴 시간을 벌 수 있을 거다.

감염병은 어쨌든 끝날 것이므로 이제 시간과의 싸움이다. 다행히 우리가 먼저 벗어난다면 전 세계를 상대로 더 큰 기회를 잡을 수도 있다. 이게 바로 나심 탈레브가 이야기한 궁극의 안티프래질이다.

인류가 이런 동시다발적인 위기를 함께 겪다보면 각 나라들의 숨은 실력이 드러날 것이고, 모든 면에서 안티프래질한 나라가 극히 드물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 나라는 힘과 돈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모두들 일단 잘 버티고 보자. 안티프래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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