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N번방 성착취물 제작 및 유포사건’을 보면서 ‘개인주의’의 잘못된 극단화와 그 끔찍함을 목도하게 되었다. 이러한 개인주의는 사실 ‘공동체’의식의 부족에서 나오는 것으로 마치 물리학적으로 단자적인 개인의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 어떤 허상의 관념이 곳곳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 우리는 ‘개인화’된 것이다. 이는 인간이 다른 개체처럼 이 세상에 태어나는 과정만 돌아보더라도 쉽게 그 의미를 이해해 볼 수 있다. 인간은 원래 ‘전 개체적’ 존재였던 태아의 상태에서 분리를 경험하면서 개인화하는 과정을 거쳤다. 처음부터 ‘독특한 개인’은 없었던 것이다. 사회화 과정 안에서 어떤 ‘개인성’을 획득한 것일 뿐.
끔찍한 사회일수록 이렇게 자신이 개체화 혹은 개인화되는 과정을 성찰하게 하는 힘이 없다. 오히려 반대로 ‘개인화’를 부추기고, 모든 것을 개인의 자유와 책임의 문제로 돌린다. 그것이 지금 인간의 문제를 특이성의 문제나 일탈의 문제로 돌린다면, 그것은 한 ‘범죄자’의 광기와 폭력에 대한 두려움만으로 ‘N번방’ 사건을 포장하게 된다.
사실 이러한 음란함은 폭력의 문제와 맞닿을 때만 보여지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안에서 우리는 모두가 페티시즘(fetishism)을 앓고 있다. 이 단어를 우리말로 번역해보면, 재미있게도 2개의 개념어가 하나의 의미를 이룬다. ‘물신숭배’와 ‘절편음란증’이란 두 가지 의미가 패티시즘이란 단어 아래 합쳐져 있는 것이다.
이제 누구나 고화질의 사진이나 영상을 찍을 수 있는 스마트 폰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갖가지 폭력의 문제를 가시화 시켜왔기에, 예전보다 이러한 과학기술의 발전이 사회를 건전하고 밝게 만들어주는 공공의 감시적 혹은 윤리적 시선을 만들어준 면도 부인할 수 없으나, 그 스마트 폰 안으로 내밀해진 인간의 욕망은 더욱 더 이미지에 집착하는 개인화를 부추겨 왔다.
인간의 성(sex)을 완전한 ‘소비’물로 인식하고 있는 지금의 사태는 이미 맑스가 『자본주의』란 책에서 인간의 가치 중에 가장 고귀한 ‘노동’이 어떻게 물신화되는지 잘 설명했던 것과 같이 자본주의가 가진 엄청난 패착의 근거들이 된다.
이 패착은 심각한 오인에서 시작되었다. 인간의 신체가 물물교환의 형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노동이 물신화되듯, 인간의 성도 물신화되고, 정치와 교육도 이러한 영향력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물신화된 현상은 물론 자본주의 안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오랜 고대부터 이런 물신화의 경향은 있었으나, 지금-현재 이는 페시티즘의 형태로 아주 견고하게 우리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다는 말이다.
물신주의가 절편음란증과 같은 의미가 되는 것은 우리의 소비 형태와 그 만족의 경험을 통해 쉽게 유추해 볼 수 있다. 30평 이상의 아파트를 가지면, 멋진 스포츠카를 사면, 예쁜 구두를 사면 우리의 행복지수가 오르는 것 같지만, 그것은 부분으로 어떤 전체를 만족시키려는 잘못된 물신주의 혹은 말 그대로 대체할 수 없는 부분(절편)을 가지고 만족의 효과를 노리는 음란한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에 대해 이렇게 예를 들어 보는 것은 단순히 어떤 일부분의 사람만 인간보다 돈의 가치를 중시하고, 어떤 정신적 결함을 가진 사람만 이상 성욕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보자는 의미에서 다뤄본 것이다. 그래서 ‘페티시즘’의 의미를 ‘자본주의’와 겹쳐 우리의 일상을 오래도록 지배해 온 일종의 정신적 속박상태로 살펴주었으면 한다.
기실 우리는 ‘전체’로서의 나를 성찰하지 못하고 잘못 오인하고 있는 부분적인 문제들에만 집착해 자신의 살피고 있는 참담한 상황은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우리가 흔히 고민하는 취직, 결혼, 연애의 문제도 ‘돈’이라는 패티시즘적 가치가 깊이 관여되어 있으며, 이외 우리가 미래의 스스로를 변화시키기 위해 하는 공부란 것도 자격증과 성적이라는 부분적 가치만 중요시 된다.
자본주의는 다시 말해 오래도록 축적해온 인류의 지혜와 보편적 윤리를 우리 삶을 윤택하게 하는데 쓸모없는 가치로 인식하도록 만든다. 즉, 인간을 물신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도구로만 작동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요즘 아니 여전한 ‘선거’ 풍토도 개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정치인들은 지역과 당파성의 문제 안에서 실재의 정치가 아닌 ‘이미지’ 정치를 하고 있다. 우리 속 깊이 내재된 것인지 모를 페티시즘의 동력은 어느 누구만의 어리석은 속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우리 삶 전체가 어떤 종교처럼 거대한 물신화에 속박되어 있음을 스스로 성찰하지 못하게 한다. 이를 조금이나마 벗어나는 사유가 가능하다면 민족, 지역, 개인 등의 이기적인 분화의 형태로만 인간의 공동체를 잘못 이미지화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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