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철의 문화칼럼] 재난의 시대, 그 주체 없는 ‘서비스’의 일상

강희철 승인 2020.05.01 16:05 | 최종 수정 2020.05.01 16:17 의견 0
사진은 칼럼 내용과 관계없습니다. [사진=픽사베이]

관공서나 은행을 방문할 때 마다 느끼는 건, 서비스를 받는 사람이 언제나 ‘초과’할 정도로 많다는 것이다. 이건 서비스를 받는 사람이나 서비스를 행해야 하는 사람이나 무척 불편한 일이다. ‘서로’에게 제대로 된 대화나 웃음을 지을 겨를도 없이 다음 ‘서비스’ 때문에 모든 관계가 간략화 되기 때문이다. 이미 인간의 관계는 서로를 ‘사물’로 응시할 정도로 물신화되어 있는 것이다. 슬픈 것은 자기 자신을 돌보는 문제까지도 여느 사람들처럼 일반화되고 단계화된 구조를 거친다는 점이다.

코로나 재난을 겪는 일상에서 전에 겪지 못한 참담한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의 주체성의 상실상태를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서로를 주체적으로 ‘응대’ 하는 것이 아닌 ‘서비스’란 소비관계에서 말을 한다는 것의 참담함은 다시 이미 익숙한 전투적 매뉴얼을 가동시키곤 한다.

이 불편한 상황을 해소하는데 있어, 전투적으로 ‘책임’의 문제를 따지는 순간 그 대상이 없는 책임의 문제는 카프카 소설의 『성』의 내용처럼 언제나 어떤 중심 찾기의 허탈함을 맞보게 된다. 이건 의식적인 각성이나 처절한 실천의 문제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공허한 중심을 만드는 자본주의적 삶의 실체를 반성하고, 그 제도적 관계의 근본적 변화를 요구해야 하는 자세가 필요할 뿐이다. 제도의 견고함에 무너진다면, 다음은 스스로 허무주의에 빠지는 주체성의 상실을 경험하게 될 뿐이기에.

상세한 나의 일상의 전투적 상황을 이야기 하자면, 필자는 커피전문점에 들려 제일 큰 사이즈의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켰는데, 컵이 중간 사이즈인 것처럼 보여서 혹시 이 컵이 중간 사이즈의 컵이 아닌가 물었더니, 종업원이 잠시 주춤 하더니 가장 큰 사이즈의 컵이 맞다고 하는 것이다. 커피 값을 계산을 한 뒤에 내가 정말 착각한 것인가 의심스러워서 계산대에 있는 커피 컵 샘플과 비교해봤더니 분명하게 중간 사이즈의 컵이었다. 그래서 왜 내가 서비스 받은 것보다 내가 금액을 과잉 지불하게 된 사태에 대해 따졌더니, ‘미안합니다’란 그 단순한 응대 매뉴얼도 없이 새로 온 종업원이라 실수를 했고,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니, 다른 사이즈로 바꿔 준다는 말만 전달하는 것이다.

나는 실수라고 하지만 종업원으로부터 거짓말을 들은 기분이고, 사과를 받지 못한 상황이며, 그 거짓말 자체를 실수일 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분명 신입으로 들어왔고, 자신이 아직 자신의 일에 능숙하지 못한 상황이면, 이 상황을 단순하게 거짓말로 넘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다른 직원에게 물으면서 자신의 미숙함을 확인해야 하는 상황이 더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고, 종업원의 단순한 실수였다고만 반복하는 총괄 담당자의 말에 난 왜 이곳에 어떤 사고에 대처하는 매뉴얼조차 없는지 궁금하게 되었다. 그래서 카페의 최종 책임자에게 지금 전화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그럴 수 없고 다만 나의 전화번호를 남기면 최종 책임자에게 나의 메시지를 전달하겠다고 했다. 피해를 당한 당사자에게 기다리고만 있으라고 하는 대처에 더는 책임을 추궁할 수 없어, 커피 전문점을 나와 이 전문점의 본사에까지 전화했지만, 결국 나에게 되돌아 온 대답은 본사는 카페를 개인에게 창업할 수 있도록 도와만 주지, 실제 대기업처럼 본사가 자회사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구조가 아니란 것이다. 그래서 다만 당신의 메시지는 그 카페의 책임자에게 전달할 수 있지만, 그가 사과할지, 그리고 나에게 전화를 다시 걸지 그것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유명한 프렌차이즈 커피숍들만이 아니라, 아주 경치 좋은 곳에 마련된 개인 건물의 커피숍에 가더라도 사람을 응대하는 것이 아닌, 서비스 상황을 접수하고만 있는 경우를 보기도 한다. 그들은 왜 사람을 ‘응대’하지 못하는 것일까? 서비스 자체에 단련된 몸 혹은 기계장치인 상태에서 나 또한 상대방을 하나의 주체로서 맞이할 수 있을까란 의문이 든다.

강희철

서로를 사물로서 바라보는 광경은 대학시절의 전투적 상황과 다를 바 없는 모순된 풍경을 보여준다. 서로를 마주하고 있지만, 왜 서로에게 분노하고 있는지 모르는 그 슬프고도 참혹한 상태는 같은 나이의 전경과 대학생이 흔히 ‘데모’라고 불리는 시위의 현장에서 서로의 신체에 가혹한 상처들을 입히던 허탈감과 다를 바 없다.

주체성 없는 상황에 내몰린 어떤 일상의 전투에 끼어드는 상황들, 책임의 중심을 찾을 수 없는 재난을 마주하는 상황들은 오늘도 지금-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다. 최근 이천 물류창고 화재 사건을 접하면서 나의 사소한 일상의 사건과 비교할 수 없을 참담한 일을 당한 유가족 분들에게 위로와 애도의 마음을 표하게 된다.

언제 책임의 중심을, 그리고 응대하는 서로를 마주하며 사는 사회에 가깝게 될 지는 계속해서 싸워내야 할 ‘제도’ 안에 있다. 정치도 당파성을 넘어서 제도적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힘으로 결집되어야 한다. 지켜내기만 견디기만 하는 기계적 서비스나 다를 바 없는 정치들이 조금씩 밀려나고 있는 이번 21대 총선 이후의 상황들이 조그만 희망이 되기도 하지만, 잘못된 제도를 계속 변화시키고 부셔나가지 못한다면 일상의 공허한 주체 없음의 참혹함은 계속 반복될 것이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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