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내는 사람 이야기 (5)『장릉사보』(단종의 사적을 모은 책)로 본 정치인 정조(前篇)

조해훈 시인의 고서로 풀어내는 사람 이야기 <5>『장릉사보』(단종의 사적을 모은 책)로 본 정치인 정조(前篇)

조해훈 승인 2017.12.15 00:00 | 최종 수정 2019.08.12 16:27 의견 0

필자 소장의 '장릉사보' 1권.

“정조의 정치력 강화와 세자에 대한 신하들의 충절 강조”

조선 제22대 왕인 정조는 1796년 『장릉사보』(莊陵史補·9권 3책)를 펴냈다. 장릉사보는 정조에게 소중한 책으로,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장릉사보(장릉은 단종의 무덤)는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후에 전개된 상황을 기록한 책인 『장릉지』(1711년 간행)를 수정·보완하여 다시 지은 것이다. 정조가 장릉사보를 왜 편찬하였을까? 여기에는 정조의 정치적인 의도가 있다. 다 알다시피 정조의 시대는 조선후기 정치와 국가체제가 부흥을 이루고 문화가 융성하게 발전하였다. 그는 규장각을 지어 학자를 우대하였으며, 남인에 뿌리를 둔 실학파와 노론에 기반을 둔 북학파 등 여러 학파의 장점을 수용하여 문화정치를 추진해 나갔다. 또한 『홍재전서』라는 저술을 통해 학자로서의 면모도 보여준 드문 왕이었다. 정조는 자신의 등극을 방해하던 정후겸·홍인한·홍상간·윤양로 등을 축출하였다. 하지만 노론의 벽파와 자신의 정치노선에 뜻을 같이 하던 남인과 소론 등이 시파를 형성함으로써 새로운 양상으로 당쟁이 전개되었다. 정조는 고민이 참으로 많은 왕이었다. 그에겐 정국운영의 주도권을 확보해야 하고, 원자(후의 순조)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해야 하는 숙명이 있었다. 여기에 역할을 한 것이 장릉사보였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그가 선택한 것은 앞선 왕들의 행적을 중시한다는 명분이었다. 이미 숙종과 영조가 이러한 사업을 펼친 사례가 있어, 선왕의 사업을 잇는다는 이유가 정당성이 있었다. 즉 숙종이 사육신과 단종의 추복(追復·죽은 이를 원래의 직위로 회복시키는 일)을 하였고, 영조가 삼정승인 황보인·김종서·정본의 추복을 하였을 뿐 아니라 안평대군 등 단종과 관련하여 화를 입은 왕자들도 차례로 추복하였던 것이다. 정조는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숙종과 영조가 했던 사업보다 더욱 많이 수용을 하였다. 그래서 정조는 선대에 추복이 이루어진 주요 인물 외에 단종에게 충의를 지킨 여러 신하의 사적을 발굴하고 표창하는 사업을 이어나갔다. 1791년에 강원도 영월군 영월에 있는 단종의 능인 장릉에 여러 신하를 함께 제향하는 배식단(配食壇) 건립과 이를 위한 근거로 단종과 관련된 제반 자료를 재정리하여 장릉사보를 편찬한 것이었다. 이는 바로 단종 사적이 가지는 상징성, 즉 왕에 대한 신하의 충절이었다. 정조는 자신의 정치력 강화는 물론 사망하기 전에 신하들이 어린 원자에 대해 절대적인 충절을 지킬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놓아야만 했다.

정조 어진 정조 어진. 출처: 어진박물관 홈페이지.

이를 위해 정조는 충절에 대한 포장이라는 원칙을 수립하고, 단종에게 충절을 지킨 신하들을 발굴토록 하였다. 이는 결국 후에 세자가 되는 원자의 위상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왕에 대한 신하들의 충절을 강조하기 위해 그 매개로 생각한 것이 단종에 충절을 지킨 신하들의 발굴이었다. 장릉사보는 이러한 목적성을 뒷받침해주는 준거가 되었다.

다시 말해 장릉사보는 세자에 대한 신하들의 충성을 강화하려는 사업에 활용된 것이었다. 정조가 신료들의 집요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세자 책봉을 계속 늦춘 이유에는 그러한 깊은 고민이 담겨 있었다. 신하들의 충성 시스템을 갖추어놓고 세자로 앉히겠다는 계산이었다. 정조는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었던 듯, 승하하기 6개월 전인 1800년 정월 초하루에 이르러 11세의 원자를 비로소 세자로 책봉한 것이었다. 이처럼 장릉사보 편찬은 배식단 건립과 맞물려 바로 세자의 위상 강화라는 정조의 정치적 의도를 반영하고 있다. 장릉사보 편찬은 단종에 대한 신하들의 충성을 자료적으로 인증하는 작업이었다. 원자가 태어난 이듬해 곧바로 이 작업이 실행되었다는 것은 정조의 의도를 명확하게 드러내 준다. 군신의 의리는 군주의 자질과 상관없이 지켜져야 한다는 원론을 제시한 것으로, 곧 국왕의 됨됨이와 상관없이 신료들은 절의를 지켜야 한다는 것, 나아가 군주의 자질을 신료들이 논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것은 곧 어린 원자에 대한 충절을 강화하려는 목적이었는데, 여기에 그 준거로 작동한 것이 장릉사보였다.

※참고문헌 -이한우, 『정조 조선의 혼이 지다』, 해냄, 20017. -안대회, 『정조 치세어록』, 푸르메, 2011. -윤정, 「정조대 단종 사적 정비와 ‘군신분의’의 확립」, 『한국문화』 35, 2005. -김문식, 「18세기 단종 유적의 정비와 〈越中圖〉」, 『장서각』 29, 2013.

<고전·인문학자, 교육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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