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4년에 『낙전선생귀전록』(樂全先生歸田錄)이 간행됐다. 이 문집은 임진왜란 때는 선무원종공신 1등에 올랐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인조를 호종하여 끝까지 성을 지켜 청군과 싸울 것을 주장한 척화오신(斥和五臣)의 한 사람인 신익성(1588~1644)의 문집이다. 그런데 이 문집은 한국인쇄사뿐 아니라 조선시대 역사에 있어 큰 의미를 가진다.
신익성 생존 시 그의 아들 면(冕)과 최(最)가 시 1,700여 수와 문 400여 편을 모아 10권으로 『낙전당집』을 편집하였는데, 그가 죽은 지 10년 뒤인 1654년에 이민구 등이 다시 편집해 이 책을 간행하였다. 『낙전선생귀전록』은 『낙전당집』에 수록되지 않은 시 등을 모아 그의 외손인 김석주가 철(무쇠)로 주조된 활자인 ‘교서관 인서체자’(校書館 印書體字)로 펴낸 것이다.
현전하는 문집 가운데 교서관 인서체자로 간행한 것은 현재 93종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책이 최초인 것이다. 마지막 시기의 간본은 1840년에 간행된 『청성집』이다. 이처럼 교서관 인서체자는 150여 년간 문집 등의 인출에 사용되었다.
이 인서체자는 관부활자(官府活字), 쉽게 말해 정부에서 책이나 문서를 찍어낼 때 쓰는 활자여서 권세(권위?)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개별적으로 교서관 인서체자로 펴낸 책의 주인공이라면 당쟁이 심했던 조선시대 정계와 학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 이 인서체자를 이용한 문집의 저자를 살펴보면 문곡 김수항, 약천 남구만, 명재 윤증, 미호 김원행 등 당대 정계와 학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인물들이었다. 그래서 『낙전선생귀전록』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노론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의 문집인 『우암선생문집』의 경우 1719년에 왕명으로 간행되었다.
교서관 인서체자가 사용되었던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에는 다 알다시피 당쟁이 치열했던 시기이다. 그리하여 교서관 인서체자로 간행되었던 문집의 저자들은 당쟁과 떨어져서 설명할 수 없는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인물들의 문집을 관부에서 간행하였다는 것은 당시의 권력이 그들의 후손들과 정치적, 사상적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에게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한 이래 현종 말에 이르기까지, 중간에 병자호란과 같은 전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배층 사이의 정치는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현종이 사망하기 직전에 일어난 ‘갑인예송’은 정치적 갈등을 극한적 대립으로 몰고 갔다. 이리하여 숙종 대에는 서로 상대 당파를 멸절시키려고 한 정변이 반복되었다.
이런 숙종 초의 정국에서 훈적체력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숙종 초반 남인 주도의 정국에서 남인의 독주를 견제하고, 경신환국 때는 국왕의 지시 아래 남인의 축출에 앞장섰다. 당시 훈척 세력 가운데 적극적인 역할을 한 대표적인 인물이 김석주였다. 김석주의 큰 아버지인 김우명은 딸이 현종의 비로 숙종의 모후였다. 김석주는 인조 이래 서인 관료계의 대표라고 할 수 있다.
김석주는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하고 새로이 소론이 대두하는 상황에서 정치구조에 따른 역할관계상 노론의 입장에 서게 되었다. 경신환국으로 재등장한 송시열은 다음해부터 자신의 북벌대의와 학문적 정통성을 과시하기 위해 종묘와 문묘의 이정과 추숭작업에 몰두하였다. 이 가운데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에는 김석주가 주동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 1689년(숙종 15)에 숙종은 장희빈이 낳은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고자 하였으나 송시열 등이 반대하고 이를 기회로 기사환국을 단행하여 서인 세력을 축출하고 다시 남인 세력을 등장시켰다. 그러나 남인세력은 오래가지 못하고 5년 후인 1694년(숙종 20)에 일어난 갑술환국으로 정계에서 물러난다. 이 시기에 교서관 인서체자로 간행된 남인계열 인물의 문집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그들이 5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집권하였고, 더욱이 갑술환국 이후 남인계열은 한동안 정계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관부의 활자를 사용할 수 없었다.
이후의 정계는 숙종이 노‧소론의 대립을 적절히 이용하여 정국을 이끌어갔다. 따라서 이 시기에 교서관 인서체자로 간행된 문집들은 소론 계열의 인물들인 이경석의 『백헌선생집』, 조종저의 『남악집』 등이 간행되었고, 노론 계열의 문인들인 김수항의 『문곡집』, 김만기의 『서석선생집』 등 노‧소론 가리지 않고 섞여 간행되었다.
그러나 1716년(숙종 42) 송시열과 윤증의 시비에 대해 숙종은 노론의 편을 들어주었다. 이것은 이른바 병신처분이라 하는데 숙종의 이러한 결정으로 인해 소론 계열의 인물들은 축출되고 노론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 시기의 교서관 인서체자로 간행된 문집은 1719년(숙종 45)에 숙종의 명으로 인해 간행된 송시열의 『우암선생문집』이 있다. 이는 당시 노론 세력의 핵심인물인 민진후의 주청으로 간행된 것으로 그들의 스승이며 정신적 지주였던 송시열의 문집을 간행함으로써 그들의 권력을 확고히 하자는 의도였던 것이다.
이처럼 교서관 인서체자로 간행된 문집과 정치적 상황을 일부분 살펴보았다. 교서관 인서체자는 관부활자이기 때문에 위의 예처럼 당대의 권력을 분리시켜 설명할 수 없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이 멸망하기 전까지 이어져 관부활자로 간행한 문집들은 모두 당대 권력을 쥐고 있었던 명문고관들의 문집들과 그들과 교유하던 인사들의 문집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김석주가 당대 실력자였기 때문에 신익성의 문집을 교서관 인서체자로 간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석주는 1684년(숙종 10)에 급사하여 정치활동을 마감하였다. 김석주의 저술인 『식암선생유고』도 교서관 인서체자로 그의 아들인 김도연에 의해서 간행되었다.
<역사한문학자·교육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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