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방랑하며 세상을 조롱한 김시습 – 현실참여 좌절 후 다시 유랑길
김시습이 37세 때 경주에서 서울로 올라간 이유는 세조가 세상을 뜨고 새 왕조가 들어서 세상이 바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세조 사후 조선 제9대 왕으로 성종(1457∼1494)이 등극하였다.
김시습은 왕위를 찬탈한 조정에서는 벼슬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혜로운 군주의 자질을 지니고 있다는 새로운 왕조 아래서는 환로에 나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도 성리학을 공부한 여느 선비처럼 인격수양 후 환로에 나가 왕도정치를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침 누군가가 상경을 권유하였다.
김시습은 서울로 올라가 서울과 근교를 왕래하다 이듬해인 1472년 가을에 도성 동쪽에 있는 수락산 폭천 부근에 짐을 풀었다. 그리곤 새 조정에서 벼슬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터라 유교 경전들을 다시 읽으며 과거 공부를 하였다. 이러한 것은 그가 뒷날 「양양부사 유자한에게 속내를 토로한 서한」에서 “성상께서 등극하셔서 현인을 등용하고 충간(忠諫)의 말을 따르시기에, 벼슬길에 나아갈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밝힌 데서 알 수 있다.
김시습은 서울로 올라간 뒤 알고 지내던 김수온을 찾아갔다. 김수온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섰고, 세조 때 서거정‧강희맹과 함께 문학가로 명성이 높은 인물이었다. 김시습은 김수온 뿐 만아니라 전부터 알던 여러 사람과 만나거나 서신을 띄웠다. 그는 서거정과도 다시 만났다. 서거정은 성종이 즉위한 뒤 경연에 참여하여 정치에 깊숙이 간여하고 있었다. 서거정은 김시습을 시승(詩僧)으로만 생각한 때문인지 천거하지 않았다.
김시습은 정치 현실이 개선되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정창손과 노사신 등 훈구파가 득세하는 상황이었다. 그는 현실정치에 참여해 자신의 포부를 펼치려고 했는데, 생각했던 만큼 그런 기회가 쉽게 다가오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금오산으로 돌아갈 것인가, 수락산에 남아 계속 벼슬길에 나갈 기회를 찾을 것인지 고민스러웠다. 수락산 폭천정사에 거처하면서 어정거린 세월이 10년이었다. 이 기간에 그는 도연명의 시에 화운하여 60여 수의 시편들을 남겼다. 김시습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 도연명이나 굴원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스스로 인식하였던 것일까. 따라서 그가 지은 이들 시는 은일 지향의식을 가진 전원시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결국 김시습은 자신과 세상 사이의 간극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김시습은 수락산 시절 당시의 정치 구조에서 소외되어 있으면서 자유를 추구했던 방외지사들과도 두루 교유하였다. 유생 남효온, 종실의 이정은, 아전 출신의 홍유손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다 47세인 1481년 봄에 홀연 머리를 기르고 환속하였다. 조부와 부친의 제사를 지내고, 안(安) 씨와 결혼하였다. 가정을 이루고 평범한 삶을 살기로 한 것일까. 아니면 사람들에게 승려로만 비치는 부분에 부담을 느낀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불행하게도 결혼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아내와 1년 만에 사별하고 만 것으로 추측된다. 더구나 이듬해에 폐비 윤씨를 사사하는 사건이 일어나서 정국이 혼란스러웠다. 김시습은 더 이상 서울 근교에 머무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일민의 생활이 자신에게는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그는 관동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두 번째 방랑이었다. 이 유랑이 시작된 때가 49세 늦은 봄이었다. 다시는 서울로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입술을 깨물었다.
김시습이 관동으로 가면서 외사창이 있던 곡운 일대(현재의 강원도 화천 사내면)에 잠시 머물다가 춘천으로 향했다. 춘천에서 소양정을 둘러보았고, 청평사에서 한동안 기거하였다. 여기서 다시 횡천을 거쳐 인제로 갔다. 51세에 강릉으로 가 머물렀다. 그의 본관이 강릉이었다. 한때 강릉의 옥에 갇혀, 옥중에서 「강릉 옥벽에 쓰다」(題江陵獄璧) 제목의 시를 지었다. 아마도 혹세(惑世)한다는 무고를 입었던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뒤 양양으로 향하여 바닷가의 낙진촌에 머물렀다,
이듬해 양양의 설악 쪽으로 들어가 현재의 강원도 현북면 법수치 부근에 있는 검달동에 정착하였다. 관동에 발을 디딘지 7, 8년이나 되자 산중 생활이 다시 갑갑해졌다. 산에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일까.
그러던 1491년 봄, 57세인 김시습은 갑자기 북한산의 중흥사에 나타났다. 증흥사는 수양대군이 찬탈하기 전까지 글을 읽던 바로 그 절이다. 이때 남효온과 김일손의 방문을 받아 5일 동안 함께 지내다 설악으로 돌아갔다.
이듬해인 58세 무렵부터 김시습은 무량사에서 지냈다. 중흥사에서 관동으로 갔다가 바로 호서로 향하여 무량사를 찾았던 것이다. 무량사는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사찰로, 마곡사의 말사였다. 무량사에서는 그해 『묘법법화경』을 판각했는데, 김시습에게 발문을 부탁하자 이듬해인 1493년 2월에 발문을 써주었다. 그리곤 3월에 병이 든 김시습이 이 절에서 마침내 59세로 세상을 버렸다. 천하를 조롱하며 유랑하던 김시습이 아니던가. 그의 유언대로 절 근처에 매장되었다. 2년 뒤 무량사 승려들이 김시습의 시신을 화장하고 부도를 만들었다.
그는 정말 시대를 앞선 천재였던가. 그래서 평생 세상을 벗어나 유랑 생활을 하였던가. 아니면 그의 말대로 꿈꾸다 죽은 늙은이였던가.
그는 시를 지을 때 저 깊은 마음에는 ‘진고자금’(陳古刺今)이라는 인식이 깔려있었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이상적인 옛 사실을 서술함으로써 부정적인 당대 현실을 풍자하는 방식이었다.
김시습은 언젠가 「깔깔대며 웃는다」(謔浪笑)라는 시를 지었다. “나는 알지, 나는 알지/손뼉 치며 깔깔 한바탕 웃노라./옛날 잘난 이 모두 양(羊:본질‧생명)을 잃었나니/시냇가에 초가 지어 사는 것만 못하리./험한 길에 서서 버티려 애쓰다니/편히 앉아 아침 햇볕 쪼임만 못하리라./… …”
홍유손이 제문에서 말했다. 김시습의 영혼이 천상에서 티끌세상을 굽어보며 깔깔 웃어대고 있을 것이라고. 그가 웃는 소리가 꼭 이러할 것이다.
현재 강원도 영월 창절서원을 비롯해 여러 사당에서 김시습을 배향하고 있으며, 강릉에 있는 김시습기념관도 그를 기념하고 있다.
<역사한문학자·교육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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