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초반 『매월당시사유록』(梅月堂詩四遊錄) 권수(卷首)에 실려있는 김시습 초상. 16세기 말 무량사에 있던 김시습의 자화상을 베껴서 모각한 것으로, 현재 전하는 초상 가운데 가장 원본에 가깝다고 한다. 출처=고려대학교 도서관 만송문고
평생 방랑하며 세상을 조롱한 김시습- 성장과정과 수학시기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은 성종 24년인 1493년 봄날 59세의 나이로 충청도 홍산의 무량사에서 세상을 버렸다. 지금의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만수산 자락에 있는 절이다. 김시습 그는 누구인가? 그를 한 마디로 규정하기는 상당히 어렵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그랬고, 그의 삶이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 필자 소장의 1927년간(刊) 『매월당집』(23권 6책)을 텍스트로 해 ‘성장과정과 수학시기’, ‘방랑의 시기’, ‘만년의 시기’ 등으로 나눠 살펴본다.
김시습은 부친 일성(日省)과 모친인 울진 장씨 사이에서 1435년 외가인 서울의 성균관 북쪽에 있는 반궁리(泮宮里)에서 출생했다. 성장 역시 그곳에서 했다. 그의 본관은 강릉이다. 강릉 김씨는 신하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6세손인 김주원(金周元)을 중시조로 한다. 김시습은 김주원의 22대 손이다.
김시습이 15살 겨울인 1449년에 모친이 세상을 떴으며, 이후 외할머니가 그를 키웠다. 하지만 3년 상중에 외할머니도 세상을 버렸다. 김시습의 아버지는 후처를 맞았다. 아버지로부터 매섭고 깊이 있는 교육을 받지 못했다. 김시습의 집안은 3, 4대째 중급의 무인이었다. 아버지는 충순위의 군직을 받았다.
김시습은 1452년 여름에 모친상을 마치고 호남의 송광사에 가 준상인(峻上人)으로 불리는 설준(雪峻)에게서 불법을 배웠다. 문종이 이 해 음력 5월 14일에 승하하고, 5월 18일에 12세의 어린 단종이 즉위하였다. 이듬해인 1453년에는 식년 문과시험이 있을 예정인데다 단종이 즉위한 것을 기념하는 증광문과 시험도 치러진다.
김시습은 곧장 서울로 올라와 아버지와는 떨어져 살면서 안신·정유의 등 여러 벗들과 함께 지내면서 과거공부를 하였다. 이 무렵 훈련원 도정으로 있던 남효례의 딸과 결혼하였다. 하지만 그의 문집에는 장인인 남효례와 아내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김시습은 1472년 성균관에서 같이 공부를 한 동지중추부사 고태필이 아내를 잃자 그에게 준 시 「증고동지」(贈高同知·『매월당집』 권6, 투증(投贈))에서 자신도 아내와 사별한 듯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필자 소장의 『매월당집』. 김시습의 후손인 김봉기가 간행했다.
김시습은 이듬해 봄인 1453년에 치러진 과거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였다. 즉 김시습은 2월의 생원시와 6월의 진사시에 각각 응시하였다가 낙방했던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 길이 없다. 그는 과거에 떨어진 뒤 서책을 싸서 삼각산(북한산) 등안봉 아래에 있는 중흥사로 올라가 과거공부를 하였다. 그는 어릴 때 ‘오세’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아주 조숙했으므로, 과거의 낙방은 그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면 ‘오세’는 무슨 소리인지, 그의 어릴 적 이야기를 들여다보자. 그는 3살이던 1437년부터 외할아버지로부터 한자를 배웠다. 오세(5세) 때부터 이미 한시를 지을 줄 알아 신동이라는 소문이 났다. 이 이야기를 들은 세종이 승지로 하여금 시험을 해보게 하고는 앞으로 크게 될 재목이니 열심히 공부하라며 선물을 내렸다. 이로 인해 김시습은 ‘오세’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5살 때 이웃에 살고 있던 예문관 수찬인 이계전으로부터 『중용』과 『대학』을 배웠으며, 이후 13살까지는 성균관 대사성 김빈으로부터 『맹자』와 『시경』·『서경』을 배웠다. 또한 겸사성 윤상에게서는 『주역』과 『예기』를 각각 배웠다.
김시습이 과거에 떨어진 그해 10월 10일에 수양대군(후에 세조)은 좌의정 김종서, 영의정 황보인, 이조판서 민신, 병조판서 조극관 등을 죽이고, 안평대군 이용과 그 아들을 강화도에 안치하는 이른바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수양대군은 스스로 의정부 영사가 되고, 이조판서와 병조판서직을 겸직하여 인사권을 거머쥐고, 내외병마도통사를 겸하여 군사권도 장악하였다. 김시습이 1455년 윤6월 11일에 단종은 마침내 위협을 이겨내지 못하고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 사실을 들은 21세의 김시습은 통곡을 한 후 책을 불사르고 어디론가 떠났다. 어디로 향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참고자료 -심경호, 『김시습평전』, 돌베개, 2004. -전성운, 「김시습(金時習) 이해의 시선과 그 의미」, 『우리문학연구』 40, 2013. -최혜진, 「매월당 김시습의 방외인적 성격과 시 정신」, 『한국민족문화』 22, 2003. -박영주, 「매월당 김시습의 문학세계」, 『반교어문연구』 12, 2000. 등
<역사한문학자·교육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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