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의 시벗 매창 초상. 출처: 해피우먼 전북
시대와 국적, 나이를 초월하여 사람에게 가장 아름다운 감정은 바로 ‘사랑’이다. 물론 사랑에는 여러 감정과 정의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남녀 간의 사랑이 가장 본능적이고 진한 감정이라고 한다.
우리가 소설 『홍길동전』의 저자로 잘 알고 있는 허균(許筠·1569-1618). 천재 시인이자 혁명가인 그는 당시 꽤나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다. 특히 기생과의 만남을 즐겼는데, 이로 인해 관직에서 파직되기도 했고, 어머니의 상중에도 기방에 출입하여 조선조 사대부 간의 험구의 표적이 되기도 할 정도였다.
다소 문제아로 보이는 그에게 신분을 뛰어넘은 플라토닉한 사랑의 대상이 하나 있다. 바로 기생 매창이다. 허균은 그녀를 인격체로 존중하며 자신의 누이인 난설헌과 함께 여선(女仙)으로 칭하며 10년 동안 시벗으로서 서로 존중하며 지냈다. 어찌 보면 허균이 쓰는 작품의 뮤즈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대체 누구일까?
“부안에 이르렀는데 비가 몹시 내려 객사에 머물렀다. 고흥달이 와 뵈었다. 기생 계생(매창의 다른 이름)은 이귀의 정인이었는데, 거문고를 끼고 와서 시를 읊었다. 얼굴이 비록 아름답지는 못했지만, 재주와 정취가 있어서 함께 얘기를 나눌만하였다. 하루 종일 술을 나누어 마시며, 서로 시를 주고받았다. 저녁이 되자 자기의 조카딸을 나의 침실로 보내주었으니, 경원하며 꺼리었기 때문이었다….(중략)” 허균의 문집 『성소부부고』(8권1책 필사본) 中 <조관기행(漕官紀行)> 1601년 7월 23일자 기사에서 발췌
1601년 당시 허균은 33세로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전운판관으로서 전라도에 방문했다. 매창(1573∼1610)은 29세였다. 위 글에서 알 수 있듯이 두 사람은 첫 만남부터 성을 대상으로 하는 일반적인 사대부와 기생의 관계가 아니었다. 허균이 시적 기량이 뛰어나고 인간적인 면모가 있는 매창을 알아보고 일반적인 기생이 아닌 시우로 대접을 한 것이다. 그녀는 이후 38년의 짧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허균과 문학으로 순수한 사랑을 나누었다.
매창은 1573년(선조 6년), 전라북도 부안현의 아전(지방 하급관리)이던 이탕종의 첩의 딸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가 계유년이었기에 계생, 또는 계랑이라 하였다. 계생은 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웠으며, 시문과 거문고를 익히며 제 어미를 따라 기생이 되었다. 기생이 된 그는 천향이라는 자와 매창이라는 호를 갖게 되었다.
매창은 시를 잘 지었다. 덕분에 많은 사대부들과 문학적인 교감을 나누며 교유할 수 있었다. 한번은 전주 감영에서 열린 전라도관찰사 한준겸의 생일잔치에 불려가 축하시를 지을 정도였다. 관찰사인 한준겸 또한 이 시에 감동하여 답시를 보내었다.
변산의 맑은 기운이 인물을 잉태해 규수 천년에 설도가 있네. 새 노래 다 듣다보니 맑은 밤이 길어져 복사꽃 가지 위에 달이 높이 떴구나.
한준겸의 문집인 『유천유고』 칠언절구 <증가기계생>(贈歌妓癸生)
당시 시를 보면 매창을 당나라 기생 설도에 비유하기도 했다. 설도는 시를 잘 지어 원진·백거이·두목 같은 시인들과 시를 주고받은 사람이다. 그만큼 매창이 시를 잘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에는 “계생은 부안 창녀인데, 시를 잘 짓는다고 세상에 알려졌다”라는 작은 주도 덧붙어 있다.
허균의 친구인 권필도 부안에서 매창에게 <증천향여반>(贈天香女伴)이라는 시를 지어주었다. 대부분의 사대부들이 매창을 기생, 또는 창녀라고 표현했지만, 그는 ‘여반’(女伴)이라고 표현해 존중하였다. 권필은 친구인 허균과 매창과의 순수한 우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녀같은 자태가 풍진 세상에 어울리지 않아 홀로 거문고 껴안고 늦은 봄을 원망하네. 줄이 끊어지면 애도 끊어지니 세상에 소리 알아주는 사람 찾아보기 어렵네.
(권필, 『석주집』, 권7) <증천향여반>(贈天香女伴)
천향은 매창의 자이다. “선녀같은 자태가 풍진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다”라는 첫 구절부터 일반 기생들과 다르게 살았던 매창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한번은 이런 시가 둘의 걸림돌이 된 일도 있다. 바로 허균의 친구인 이원형의 시인 <윤공비>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매창은 타 지역으로 떠나는 지역 현감에게 바치는 헌정비 앞에서 단순히 울며 노래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 시가 공개되면서, 허균이 당대 보수적인 사대부들로부터 공격을 받게 된 것이다. 지금으로 치면, 유명인사의 사생활에 관한 스캔들이 대대적으로 기사에 난 것과 같다.
이로 인해 곤란해진 허균은 매창에게 편지를 써서 다시는 이런 오해받을 짓을 하지 말라고 꾸짖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허균은 이 일 때문인지 공주목사에서 파직 당하고 만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즐기자는 생각이었을까? 이후 그는 매창과 해안이라는 승려와 더불어 주변 여러 절경을 찾아다니며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르며 술 마시는 풍류 속에서 울분을 삭였다. 허균은 이때 매창에게 불법의 진리와 참선을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매창은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활발한 창작활동을 했다. 부안현감 심광세가 매창의 시 <춘원>(春怨)을 차운하여 시를 쓰기도 했다. 춘원은 매창이 35, 36세쯤에 쓴 것이다.
시름겨워 꿈도 자주 깨니 화장 얼룩진 눈물이 베개를 적시네. 땅에 가득 꽃잎 떨어지며 봄빛도 떠나가자 발 사이로 가랑비 내리고 향 연기 피어오르네.
(심광세, 『휴옹집』 장(張)2.) <차계량운>(次桂娘韻)
매창 문집인 『매창집』. 출처: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1609년 9월 허균은 매창에게 두 번째 편지를 보낸다. ‘봉래산의 가을이 한창 무르익었으리니, 돌아가고픈 생각이 가득가득 난다오. 그대는 틀림없이 성성옹(惺惺翁: 허균 자신을 가리킴)이 시골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어겼다고 웃을 거요. 그때에 만약 생각을 한번 잘못 먹었더라면 나와 그대의 사귐이 어떻게 10년 동안이나 그토록 돈독할 수가 있었겠소. 이제 와서야 진회해(秦淮海)는 진정한 사내가 아니고 망상을 끊는 것이 몸과 마음에 유익한 줄을 알았을 것이오. 어느 때나 만나서 하고픈 말을 다할는지 편지 종이를 대하니 마음이 서글프오.’ 여기서 허균이 매창에게 보내는 플라토닉한 사랑의 감정을 느껴볼 수 있다. 진회해(1049~1100)는 북송대의 시인으로서, 남녀의 사랑에 관한 시를 많이 남겼다.
허균이 매창에게 쓴 두 통의 편지는 허균의 문집에 실려 있다.
매창은 후손이 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그녀의 작품들은 없어지고 여러 사람들에게 흩어져 있다가 사후 58년이 지난 뒤 지역의 아전들이 58수를 편집해 개암사에서 목판으로 『매창집』을 간행하였다. 문집에 실린 매창의 시는 모두 30대에 지어진 것이다. 매창집의 발문에 따르면 “수백여 수가 일시에 회자되었지만, 지금은 거의 흩어져 없어졌다”고 하는 것을 보면, 살아생전 지은 시는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매창집은 오언절구 20수(12제), 칠언절구 28수(23제), 오언율시 6수(3제), 칠언율시 4수(4제) 순으로 편집되어 있다.
안타깝게도 매창집에 허균을 뚜렷하게 드러낸 시편은 보이지 않는다. 그건 아마도 1618년(광해군 10) 8월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과 관련해 허균이 그의 동료들과 함께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을 당하였기에 허균과 관련된 시편들을 의도적으로 빼버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참고자료
1. 허경진 옮김, 『매창시집』, 평민사, 2007. 2. 김명희, 「허균과 매창의 시조」, 『時調學論叢』 22, 2005. 3. 齋敏, 「매창(梅窓)의 시의식(詩意識)」, 『인문과학논집』 26, 2013. 4. 허경진, 「『매창집』에 관련된 인물과 창작 시기에 대하여」, 『韓國漢文學硏究』 40, 2007.
<역사한문학자·교육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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