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기차가 곧 도착한다는 방송은 대합실의 사람들을 움직이게 한다. 문을 나서며 집 쪽으로 시선을 돌려본다. 좀은 서운하다. 그러나 청나라로 끌려가는 김상헌의 처지는 아니다. 고작 짧으면 열흘, 길면 한 달 떠나있을 뿐이다. 한데 왜 기약 없이 타국으로 잡혀가는 김상헌의 시조를 느닷없이 읊조리게 되었을까?
어디까지 가냐고 고향 선배가 물었다. “무릎이 안 좋아서 수술하러 부산까지 갑니다.” 선배는 의외라는 듯, “동생은 일도 안 하는데 왜 무릎에 고장이 났을꼬? 맨날 자전거 타면서 건강관리도 잘하더만.” 선배가 말하는 ‘일’은 논일 밭일 따위의 육체적 노동을 의미한다. “워낙 사람이 부실해서 안 그렇습니까.” “동생은 무슨 별소리를.” 선배와 마주 보며 웃었다.
많이 걸었다. 젊었을 적엔 또래의 평균치 이상으로 산행을 했다. 동래 사직동에 살 때는 샘이산과 금정산을 맨발로 쏘다녔다. 귀향해서도 일주일에 서너 번은 한 시간 이상씩 맨발로 걸었다. 그래서일까? 무릎뼈(슬개골) 아래의 연골이 닳아 없어졌다. 그러나 나보다 더 많이 산행을 하고, 더 많이 조깅하는 사람도 무릎이 무탈하다. 한데 나는 왜? 아마 맨발이어서 완충 구실을 하는 신발을 신지 않아서 연골에 손상이 심해진 건 아닐는지.
또 있다. 내가 평소 즐기는 행위가 무릎 건강에는 독이 됐다는 사실이다.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아 신문이나 책을 보는 게, 무릎이 아프기 전까지의 일상이었다. 지금이야 식당도 거의 입식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 술자리는 좌식이었다. 어떤 술자리든 시작부터 파할 때까지 책상다리를 하고 허리를 꼿꼿이 폈다. 거의 다리를 풀지 않았다. 이 자세의 지킴을 마음 다잡는 표지(標識)로 삼았다. 그랬으니 일상생활이 무릎 연골에 부담을 지우는 독이 된 셈이다.
청나라는 1636년 전면적 침략을 단행했다. 서울을 장악하고 방화와 약탈과 부녀자 겁탈을 일삼았다. 서울 주변의 모든 백성도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그러나 인조는 남한산성에 갇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조선은 철저히 항전하여 죽느냐, 항복하여 사느냐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김상헌이 주도하는 항전파는 죽어도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을 수 없다는 척화파였고, 최명길이 주도하는 화의파는 우선 백성을 살려야 한다는 주화파였다. 조정을 이 둘로 갈렸다. 김상헌은 최명길이 작성한 항복문서를 찢으면서 유교적 대의명분을 살리려 했고, 최명길은 화의를 하여 일단 백성을 살려놓고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종국에 인조는 삼전도로 나와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절차’(三拜九叩頭)로 항복식을 했다. 항복을 한 뒤 김상헌과 최명길은 함께 전범으로 몰려 볼모로 잡혀갔다.
국제정치를 현실논리로 풀어야 한다는 주화파들의 세계인식에는 동의한다. 현대의 국제관계도 ‘가치’보다는 ‘실리’가 우선이다. 힘과 힘의 대결이므로 힘이 턱없이 부칠 때는 한 발 후퇴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문제는 척화파들이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지키고자 했던 대의명분의 정체이다.
척화파들은 철저히 명나라를 받드는 주자학파였다. 주자는 북방민족인 금(金)나라가 중국을 침입하자 철저 항전을 주장하는 존왕양이(尊王攘夷)의 논리를 폈다. 중화주의 가치관에 따라 오랑캐와 한 치도 타협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척화파들은 중화주의에 따라 금나라와 청나라를 오랑캐 무리라고 봤다. 그리고 명나라는 임금(부모)으로 받드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명나라를 위해 신명을 바치는 것이 변함없는 인간의 도리라고 척화파들은 주장했다. 한마디로 그들의 대의명분은 ‘명나라에 대한 충성’이었다.
무릇 예나 지금이나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게 있고,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다. 척화파든 주화파든 현대의 여야든 정치가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어야 하는가? 그 잣대는 백성의 안녕이다. 모든 문명의 높고 낮음의 척도 역시 구성원(백성)의 행복도이다. 백성이 도륙 당하고, 겁탈 당해 자살까지 하는 판국에 무슨 놈의 대의명분! 백성을 위한 대의명분이 아니라면, 그것은 기득권 수호를 위한 포장술일 뿐이다.
척화론자인 홍익한은 체포되어 먼저 죽임을 당했고, 윤집과 오달제는 심양의 서문 밖에서 처형당했다. 이 세 사람은 의리를 지키다 죽은 충신으로 삼학사(三學士)라는 기림을 받았다. 한데 세 사람이 목숨과 바꾼 의리는 다름 아닌 ‘명나라에 대한 충성’이었다. 이 기림은 정당한가?
김상헌은 최명길이 갖고 있던 종이두루마리(항복문서)를 빼앗아 읽어보고는 그 자리에서 북북 찢어버렸다. 최명길은 묵묵히 찢어진 종이를 모아 베껴 썼다. “찢는 사람도 충신이고, 주워모아 다시 쓴 사람도 충신”이라는 평가하는 사람도 많다. 과연 그러한가? 해답의 실마리는 ‘누가 나라를 이 지경에 이르도록 하였는가?’ ‘진정 백성을 살리는 길이 무엇인가?’에 있다.
척화파의 정치적 계승자는 노론이다. 노론은 거듭 집권하면서 주자학의 교조성을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이 노론의 계승자가 친일 정치세력이고, 친일 정치세력의 현재 계승자는 어느 당일까?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데, 굳이 거명할 필요가 있으랴!
이런 상념에 빠져 있는데, 어느덧 기차는 종착역이자 목적역인 부전역에 도착했다. 세흥병원이 근거리에 있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택시를 잡았다. 책은 생각보다 무겁다. 책과 세면도구 등 잡동사니가 든 가방은 더 무겁다. 다리가 불편하다. 불편 다리에 무거운 가방을 들면, 객관적인 물리적 거리는 별무소용이다. 성한 다리의 1km 이동거리도 마라톤 거리만큼 언감생심이다.-계속-
<작가, 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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