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송원의 ‘천방지축, 세상을 논하다’ (42) 럭셔리한 사람①

조송원 기자 승인 2022.06.05 09:30 | 최종 수정 2022.06.07 08:50 의견 0
[사진 = 조송원]

#1. 진나라 소왕은 옹후와 다른 신하들과 상의한 끝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백기는 사는 곳을 옮겨 가면서 속으로는 복종하지 않고 뼈 있는 말을 했소.” 그리고 곧 사자를 보내 무안군(백기)에게 칼을 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했다. 무안군은 칼을 받아들고 자신의 목을 찌르려다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잠시 동안 그렇게 있다가 말을 이었다. “나는 죽어 마땅하다. 장평 싸움에서 항복한 조나라 병사 수십만 명을 속여서 모두 산 채로 땅속에 묻었으니, 이것만으로도 죽어 마땅하다.” 그러고는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기/백기·왕전열전-

#2. 2012년 갤럽 조사에 따르면, 미국민의 15%만이 호모 사피엔스가 신의 개입 없이 자연선택만을 통해 진화했다고 생각한다. 32%의 미국인은 인간의 초기 생명 형태에서 수백만 년에 걸쳐 진화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신이 이 쇼 전체를 지휘했다고 주장한다. 46%의 미국인은 성경에 적힌 그대로 신이 지난 1만년 동안의 어느 시점에 지금의 형태로 인간을 창조했다고 믿는다.

같은 조사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은 대학 졸업생들 가운데 46%가 성경의 창조 이야기를 믿는 반면, 14%만이 인간이 신의 감독 없이 진화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심지어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들 가운데 25%가 성경을 믿고, 고작 29%가 자연선택만으로 우리 종이 생겼다고 믿는다.-유발 하라리/호모 데우스-

#3. 진주만 기습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전세가 역전되고, 과탈카날 해전에서 미국이 완전히 승기를 잡았다. 그 이후로는 사실상 일본군 학살에 가까운 전투가 벌어졌다. 얼마나 미군이 일본군에 비해 압도적 전력이었든지 한 전투의 이름이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이었겠는가.

그러나 일본은 항복을 거부했다. 장병들에게는 항복이 금지되었다. 그리고 하달된 명령은 “텐노 헤이카 반자이”(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며, “전원 옥쇄玉碎하라”라는 거였다. 결과적으로 필리핀 루손 섬 전투에서만 일본군은 205,535명이 전사했다.

10층 건물인 세흥병원의 옥상, 곧 11층은 ‘하늘공원’이다. 이 곳은 흡연구역과 비흡연구역으로 나눠있다. 흡연구역에서 만나지는 시각과 얼굴은 정해져 있다. 아침 식후, 점심시간, 저녁밥 후의 시간에는 어김없이 ‘골초’들이 만나진다. 50세 전후로 뵈는 한 사람을 눈여겨 봐왔다. 환자가 아니다. 환자는 80대의 아버지이다. 출근하지도 않고 아버지를 간병하다니, 효자인 셈이다. 내 깜냥으로는 그렇게 생각되었다.

“굳이 담배를 끊을 필요가 있어요? 즐기다가 제때 빨리 가야지. 아버지를 보니, 늙어서 제때 가지도 못하고 병원 신세 지는 것, 본인도 자식도 할 짓이 아니더라고요.”

그는 외아들이어서 모실 사람이 자신뿐이라고 했다. 하여 가게를 닫고, 간병에 전념한다. 아내가 교사라서 생활에는 지장이 없다. 아버지의 재산이 제법 있어 병원비는 걱정 없다. 병원비를 아내의 봉급에서 지출해야 한다면, 아마 아내는 이혼하자고 할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의외였다. 아니, 바람에 어긋난 사실에 약간 당황했다. ‘효행’이 살아있음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내 나이는 그와 그 아버지 나이의 어중간이다. 그러나 세상을 보는 눈은 그보다는 그의 아버지 시각에 내가 기울어 있음을 직감했다. 나는 효나 사랑 같은 ‘과거’에 아직 가치를 둔다. 그러나 그는 세칭 ‘쿨’했다. 효행도 경제적 현실의 반영일 뿐이고, 사랑도 삶의 한 방편일 뿐, 독자적인 가치는 아예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의 말은 씁쓸한 기억을 소환했다. 한 후배가 건강이 안 좋다. 시골에서 요양 중이다. 아내는 도시에서 산다. 한 번씩 찾아주고, 생활비도 보내준다. 후배에게 좋은 아내를 둬서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후배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리며 나직이 말했다. “제 사망 보험금이 제법 됩니다.”

사람의 삶에 무슨 의미나 가치가 있는 것일까?

기원전 260년 전국시대 막바지의 최대의 전투가 장평대전이다. 이 전투에서 진나라의 상장군 백기는 투항한 조나라 40만 명을 갱살(坑殺. 구덩이에 산 채로 넣고 묻어 죽임)했다. 참수(斬首. 목을 베어 죽임)했다고도 한다. 전과戰果는 과장되기 마련이다. 『사기』의 40만이란 기록도 과장되었음이 고증되었다. 그러나 줄잡아 조나라 군사가 10만은 되었고, 투항한 병사가 아무리 줄여 잡아도 5만은 된다고 한다. 적어도 이 5만은 갱살이든 참수이든 간에 한꺼번에 죽임을 당했다. 이들에게 삶의 의미나 가치는 무엇일까?

조송원 작가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며, 옥쇄한다고?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칠 수는 있다. 그러나 옥쇄는 아니다.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지는 것’이 전장에서 가당키나 한 일인가. 포탄에 사지가 찢겨 육신이 너덜너덜 넝마가 되어 죽는다. 총탄에 피범벅이 되어 꼴깍 숨이 넘어갈 뿐이다. 만 년이나 영화를 누리라던 히로히토는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일본제국의 만행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 숱한 전투에서 죽고 죽인 사람들, 루손 전투에서만 해도 전사한 205,535명의 일본인, 이들에게 삶의 의미나 가치는 무엇일까?

우리가 역사와 역사적 사실들을 공부하면 할수록, 인간을 포함해 이 땅에 존재하는 생물들의 뿌리에 대해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인간의 삶에 의미나 가치는 발 딛을 공간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지만 인간은 ‘의미 없음’을 견디지 못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동물이다. 이는 현대의 미국인들이 왜 이다지도 ‘종교적’인지를 설명한다. -계속-

<작가/본지 편집위원, ouasaint@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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