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룡과 이승만 [출처 = 위키피디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 백범 김구, 해방 후 그도 임시정부의 요인 자격이 아니라 일반인 신분으로 귀국해야만 했다. 미군정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백범은 모윤숙 등 친일파 263명의 살생부를 품고 귀국했다. 친일부역자나 민족배신자 처벌은 민족정기를 바로세우는 첫걸음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김창룡의 지령을 받은 안두희에 의해 암살되었다.

김창룡이 누구인가? 일본 육군 헌병으로 일제를 위해 우리의 항일 독립군과 전투를 벌여 독립군을 죽인 사람이다. 일본 천왕 입장에서는 혁혁한 전공을 세운 황국신민이었고, 우리에게는 철천지한을 남긴 민족 배신자이다. 이런 그가 대한민국에서도 승승장구했다. 일본군에서도 일개 헌병 사병에 불과했던 그는 1950년 10월에 대령으로 승진했으며, 1951년 5월에는 육군 특무부대 대장까지 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31세였다. 육군 특무부대는 국군기무사령부(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의 전신이다.

김창룡의 출세가도는 해방 정국과 6·25전쟁 그리고 이승만과 관련이 깊다. 김창룡은 광복 후 친일에서 반공으로 그 전공(專攻)을 바꿨다. 독립군을 때려잡듯 ‘빨갱이’를 때려잡았다. ‘빨갱이가 없으면, 빨갱이를 만들면 된다’며 숱한 빨갱이 조작 사건도 만들어냈다. 이승만이 적극 후원했다. 이승만은 국무회의에서 “여러분, 김창룡 대령을 자식처럼 사랑해 주세요.” 라고 공개적으로 칭찬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최고등위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까지 수여했다.

물극필반(物極必反)이라 했던가. 사물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되돌아오게 된다. 사람의 일도 마찬가지이다. 1955년 1월 김창룡은 육군 소장으로까지 진급하게 된다. 그러나 이승만을 등에 업고 자행하는 월권행위와 빨갱이 조작 사건 등의 악행과 횡포를 보다 못한 특무대 출신 4명이 김창룡을 저격, 암살했다. 문제는 이 사건 이후 이승만의 처신이다.

이승만은 김창룡의 죽음을 보고 받은 그날로 중장으로 추서했다. 국군 최초로 국군장을 치러주었고, 그날은 육해공군 전 군부대에 조기를 게양하게 했다. 김구가 죽었을 때는 한 번도 조문하지 않았던 이승만은 김창룡의 영전에는 3번이나 조문했다. 그리고 이승만은 조사에서 “김 중장은 나라를 위해 순국한 것이며, 충령의 공을 세웠다.”까지 말했다. 현재도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묘역이 묻혀있다.

시인 모윤숙은 광복 후 일제치하의 친일행위, 민족반역행위에 대한 어떤 단죄도 받지 않고, 되레 승승장구했다. 1947년 시집 『옥비녀』를 출간했고, 같은 해 10월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총회에 한국 대표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1960년 국제펜클럽 한국위원장을 맡았으며, 1963년에는 예술원상 문학부문상을 수상했다. 1970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까지 받았고, 민주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 배지(badge)까지 달았다. 1979년에는 『황룡사 9층 석탑』으로 3·1문화상을 수상했다.

3·1문화상이 어떤 상인가? 3·1운동, 3·1혁명의 정신을 기리고자 발족한 단체가 3·1문화재단이다. 한데 침략자 일제를 위해 민족의 아들과 딸들을 총알받이로 전선에 나가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라고 열변을 토하던 그녀에게 3·1문화상을 수여한 것이다. 뭐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게 아닌가. 친일부역자를 처단,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대한민국의 슬픈 현실이다.

자발적 친일로 민족을 반역한 많은 문학인들의 작품이 광복 후 대한민국의 중등교과서에 실렸다. 모윤숙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도 교과서에 실렸다. 교사는 이 시를 학생들에게 어떻게 가르칠까?

심훈은 1901년생이다. 1936년 35세에 요절하지 않았다면, 해방 정국과 이승만 독재, 뒤를 잇는 군부독재를 경험할 수 있었다. 친일에서 반공으로 말을 갈아타고, 천황에 충성하던 그대로 독재에 충성하는 숱한 친일문인들을 목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독재 찬양을 애국으로 분식하고, 작품들이 교과서에까지 실리고 문화·예술계를 쥐락펴락하는 만화경을 보는 심훈의 심중은 어떠했을까?

두개골이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상관없고, 자신 몸의 가죽으로라도 북을 만들어 둥둥 칠 정도로 기쁜 ‘그날’, 그 그날이 친일파들이 득세하는 친일파 세상이라는 걸 두 맨눈으로 목도했을 때, 심훈의 심중은 어떠했을까? 과연 목숨줄을 놓지 않고 견딜 수 있었을까?

이 의문은 프리모 레비를 생각하게 한다. 그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자다. 그곳에서의 체험을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작품으로 발표해, 강제수용소의 추악한 실상을 세상에 폭로했다. 그러나 레비가 증언한 것은 단순히 강제수용소의 비인간적 잔혹함에 머물지 않았다. 이 책은 과거의 잔혹한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증언이 전달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위기에 대해서도 증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 그 자체의 위기를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레비는 본래 화학자였다. 『이것이 인간인가』 발표 후, 1975년 그의 세 번째 회고록인 『주기율표』는 작가로서의 면모뿐 아니라 화학자로서의 면모도 잘 녹아있는 걸작이다. 레비는 작가로서 유명인이 된 뒤에도 자신이 취직한 공장에서 일하며 1977년 퇴직할 때까지 일과 저술을 병행했다. 그러던 그가 1986년 최후의 저서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출간하고 1년 뒤 자택에서 자살했다.

왜 자살했을까? 세간에 알려진 대로 단순히 우울증 때문이었을까? 그렇다고 해도 우울증의 근인(根因)은 무엇이었을까? 또 하필 심훈의 얼굴이 프리모 레비에 겹치는 까닭은 무엇일까? <계속>

<작가/선임기자, ouasaint@injurytim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