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화상이 혜능에게 물었다.
“너는 어디서 온 자이며, 나한테서 무엇을 구하고자 이렇게 찾아왔느냐?”
혜능이 답했다.
“제자는 영남에 사는 신주 백성으로, 화상을 찾아뵈온 것은 다른 어떤 것도 구하는 바 없고 오직 부처가 되고자 함이올 뿐입니다.”
홍인화상이 힐책하는 어조로 반문했다.
“너 같은 영남의 야만인이 어찌 감히 부처가 될 수 있단 말이냐?”
그러자 혜능이 답했다.
“사람에게는 남북의 구별이 있을 수 있겠지만, 불성에야 어찌 남북의 분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야만인인 저와 화상의 신분은 비록 같지 않습니다만 불성에야 어찌 차별이 있겠습니까?” (돈황본 <단경> 3절)
그 유명한 ‘불성무남북’(佛性無南北) 선문답이다. 일자무식의 나무꾼인 혜능과 5조 홍인대사와의 첫 만남에서 이루어진 대화이다. 조사란 불교에서 종파를 열었거나 그 종파의 법맥을 이은 선승(禪僧)을 이르는 말이다. 달마대사 이전까지는 경전 중심의 교종 불교였다. 그러나 달마대사가 소림사에서 9년간 면벽좌선하여 득도한 후, 좌선 중심의 선종을 개창했다. 물론 달마가 중국에 머무르던 시기에 그 소림사란 절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훗날 선승들이 자신들의 조사를 높이고자 신비적 색채를 덧씌운 각색임을 알 수 있다.
어쨌건 선종의 초조(初祖. 1대 조사)는 보리달마, 제2조는 혜가, 제3조는 승찬, 제4조는 도신, 제5조는 홍인이다. 아직 출가도 하지 않은 혜능이 5조 홍인을 첫 배알하는 자리에서 ‘불성무남북’이라는 선문답이 나왔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혜능은 홍인의 인가를 받아 선종 제6조가 된다. 그리고 한국의 조계종은 6조 혜능의 법맥을 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혜능 이후 제7조나 제8조 등은 없다. 왜 이렇게 됐을까? 혜능이 5조 홍인의 의발(衣鉢. 승려의 옷과 밥그릇)을 전수 받아 제6조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보면, 출세간의 승려나 세간의 속인들의 행태가 별반 다르지 않음을 볼 수 있다. 나아가 한국 조계종의 그 많은 분규나 이권 다툼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혜능(638~713.당나라 시대의 선승. 선종의 6조이자 남종선의 종조)은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늦둥이에다 외아들이었다. 홀어머니는 이미 늙어 노동력이 없었다. 하여 공부할 여유가 없어 글을 읽지도 못했다. 10여 세 때부터 땔나무를 하여 시장에 팔아 어머니를 봉양했다. 이 같은 가정환경이 소년 혜능에게 일찍이 ‘인생이란 무엇인가’고 생각게 하지 않았을까?
어느 날 혜능은 시내로 땔나무 장사를 나가, 땔나무를 산 사람의 집까지 져다주었다. 그 집에서 나오는데, 한 탁발승이 문 앞에서 어떤 경전을 독송했다. 마음에 와 닿는 바가 있었다. 혜능은 승려에게 무슨 경전이냐고 물었다. 『금강경』이라고 했다. 혜능은 다시 어디서 왔으며, 이 경전을 어떻게 구했냐고 물었다. 탁발승은, ‘기주 황매(현 호북성 황매현)의 동산사(東山寺)에서 왔다. 그곳에는 5조 홍인대사가 주석하면서 불법을 전파한다. 문도가 1000명이 넘는다. 또 5조께서는 『금강경』 한 권만 가지면 곧바로 견성, 성불할 수 있다고 대중들에게 설하고 있다.’ 라고 전해주었다.
혜능은 이 말을 듣는 순간, 자신에게 숙업의 인연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어머님께 고별인사를 하고, 곧장 황매로 달려가 홍인대사를 예배했다. 이 예배 때의 문답이 이 글 서두의 ‘불성무남북’이다.
혜능은 남루한 ‘남방 소수민족 복장’을 한 키 작은 노총각이었다. 그러나 5조 홍인은 외모와는 달리 범상치 않은 그릇임을 이 문답들 통해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래서 “방앗간으로 가서 방아 찧는 일이나 하거라.”고 명했다. 혜능은 5조의 명대로 방앗간에서 방아 찧는 일과 장작 패는 일 등 잡역을 하는 행자 생활을 했다.
혜능이 8개월째 방아 찧는 행자생활을 하던 어느 날, 5조 홍인화상은 후계자 선발을 위해 심게(心偈. 마음의 깨친 바를 쓴 게송)를 공모했다. 홍인은 1000명이 넘는 동산사 학인을 대상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각자 게송을 하나씩 지어 내게로 가져오라. 내가 너희들의 게송(시)을 보고 불법의 대의를 참으로 깨친 자가 있으면, 역대 조사를 잇는 증표인 가사(袈裟)를 전해주어 제6대 조사가 되도록 하겠으니 서둘러 각자 게송을 짓도록 하라.”
동산법문에는 신수(神秀. 606~706) 상좌가 있었다. 그는 혜능보다 32세 위이고, 혜능이 행자에 불과한데 반해, 그는 이미 큰스님으로 칭해지고 있었다. 신수는 출가 이후 노장·유학·불교 삼장 등을 두루 섭렵하여 통하지 않는 데가 없는 박식이었다. 학인들은 수상좌인 신수 스님이 홍인대사의 법석(法席)을 이을 후계자가 될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하여 자신들은 게송을 지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게송을 짓지 않기로 결의했다.
신수는 학인들의 결의에 마음이 착잡했다. 이제 꼼짝없이 자신이 게송을 지어 올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게송을 짓지 않으면, 5조께서 내 마음에 깨친 바의 깊고 얕음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게송을 지어 올리는 마음은 오직 법을 구함이요, 6조의 조위를 쟁취하고자 함이 아니다. 6조의 조위를 얻고자 함이라면, 속인이 성인의 지위를 쟁취하고자 함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나는 조위를 다투어 얻고자 하는 생각은 꿈에도 없다. 다만 내가 게송을 지어 올리지 않으면, 끝내는 불법에 도달하지 못한 꼴이 되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꼬.
신수는 갈등과 깊은 고뇌 속에서 몇 번을 망설이다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었다.
身是菩提樹(신시보리수) 몸은 지혜의 나무요
心如明鏡臺(심여명경대) 마음은 밝은 거울의 받침대다
時時勤拂拭(시시근불식) 때때로 부지런히 닦고 털어서
莫使有塵埃(막사유진애) 먼지가 끼지 않도록 하라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이 글은 이은윤의 『육조혜능평전』(2004)을 저본으로 삼았음을 밝힙니다.
<작가/선임기자, ouasaint@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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