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神秀) 상좌는, 게송은 힘들게 지었지만 홍인화상에게 감히 갖다 올리지 못했다. 등에는 식은땀이 났다. 궁리 끝에 야밤에 방장실 앞 회랑 벽에 붙여놓았다. 과연 다음날 아침, 홍인화상이 이 게송을 보았다.
“아직 미혹한 학인들이 이 게송에 의지해 수행하면,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는 것은 면할 수 있겠구나.”라고 말하며, 학인들을 게송 앞으로 소집해서는, “신수의 게송에 분향 경배하고 이 게송을 수지(受持)·암송토록 하라.”고 지시했다. 학인들은 게송을 한 번씩 소리 내어 읽어보고는 모두 훌륭하다고 감탄했다.
그 후 홍인은 신수를 방장실로 불렀다. “너의 게송은 다만 문전에 도달했을 뿐, 아직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지는 못했다.”고 평했다. 그리고 “범부가 이 게송에 의지해 수행하면 추락하지는 않겠지만, 무상보리(無上菩提)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니 다시 게송을 지어오도록 하라. 만약 그 게송이 자신의 본성을 꿰뚫어본 것이라고 판단되면, 너에게 가사를 전해 법을 부촉(咐囑)하겠다.”고 말했다. 신수는 방장실에서 돌아와 며칠을 두고 고심하며 노력했으나, 끝내 게송을 다시는 짓지 못했다.
혜능은 방아를 찧고 있었다. 한 동자승이 방앗간 앞을 지나가면서 신수의 게송을 열심히 암송했다. 혜능은 동자승에게 “암송하는 게 무슨 게송이냐?”고 물었다. 동자승은 어이없다는 듯이 “자네는 그것도 모르는가?” 하고 반문하면서, 저간의 일들을 소상히 얘기해 주었다. “나는 여기서 8개월째 방아만 찧고 있어서, 아직 방장실 앞을 가보지 못했다. 그러니 동자승이 나를 남쪽 회랑까지 데리고 가서 그 게송에 예배하고, 수지·염송해 해탈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남쪽 회랑에 도착한 혜능은 신수의 게송을 향해 예배를 올렸다. 그러나 혜능은 글자를 몰랐기 때문에 게송을 직접 읽을 수가 없었다. 옆에 있던 참배객에게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크게 읽어주자 혜능은 대번에 대의를 파악하고는, 곧바로 자신도 게송을 한 수 읊고자 했다. 글자를 전혀 모르는 무식한 혜능은 그 참배객에게 자신이 읊는 게송을 글자로 써달라고 부탁했다.
참배객은 같잖다는 듯이, “자네가 게송을 읊겠다고? 참으로 희한한 일이구나”라고 말했다. 이에 혜능은 “미천한 사람에게도 고귀한 지혜가 있을 수 있고, 상상인(上上人)도 전혀 지혜를 갖지 못한 경우가 있다.”고 응대했다. 그러자 참배객은 “좋다. 게송을 지어봐라. 내가 글로 옮겨주겠다. 만약 자네가 득법을 하면 나를 먼저 제도해 줄 것을 잊지 말라.”고 비아냥거렸다.
菩堤本無樹(보리본무수)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고
明鏡亦非臺(명경역비대) 거울 또한 받침대가 아니다
佛性常淸淨(불성상청정) 불성은 늘 맑고 깨끗하거늘
何處有塵埃(하처유진애) 어디에 먼지·티끌이 붙으랴
혜능의 게송을 본 학인들은 놀랐다. “방아나 찧는 행자가 이런 게송을 짓다니. 참으로 겉보기와는 다르구나.” 마침내 5조 홍인화상도 게송을 보았다. 단박에 불법의 대의를 제대로 깨친 게송이라고 내심으로는 반겼다. 그러나 주위 학인들의 시선을 의식했다. 게송에 대한 칭찬으로 혜능이 해를 입을까봐, 게송을 떼어내 찢어버리면서 ‘미견성’(未見性)이라고 폄하했다. 아직 견성에 이르지 못했다는 말이다.
홍인은 깊은 밤에 혜능을 방장실로 불렀다. 5조는 대중들의 눈을 피하고자 가사로 문을 가려 불빛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했다. 홍인은 혜능이 이미 자신의 본성을 깨쳤음을 알고는 돈교(頓敎)의 선법과 조위 계승의 신표(信標)인 가사를 혜능에게 전해주면서 다음과 같이 일렀다.
“이 가사(袈裟)는 지난날 달마조사가 인도로부터 중국에 와서 선법을 전파한 이래 역대 조사들이 그 법맥의 계승 증표로서 면면히 전해온 것이다. 이제 이 가사를 너에게 전해줌으로써 너는 선종의 제6대 조사가 된 것이다. 유념할 점은, 이 가사는 전승의 증표일 뿐 불법의 본체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불법이란 이심전심으로 전하고 자오자해(自悟自解)하는 것이다. 자고로 불법을 이어받은 사람은 목숨이 실 끝에 매달린 것처럼 위험하기 때문에 너에게 가사를 전수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아주 큰 부담을 안겨주는 일이기도 하다. 늘 조위 계승의 상징인 이 가사를 서로 차지하려는 다툼이 벌어질 테니, 전의부촉(傳衣咐囑) 전통은 너에게서 끝내고 다음부터는 가사를 전수해 주지 말도록 하라. 네가 계속 여기 있으면 대중들이 너를 해할까 두려우니 즉각 여기를 떠나거라.”
혜능은 남쪽으로 야반도주를 했다. 사흘 후 홍인은 사내 대중을 불러 모아 가사와 법통에 남쪽으로 내려갔음을 알렸다. 학인들은 경악한 채 어리둥절해 했다. 5조의 법통과 가사가 방앗간에서 잡역을 하던 행자 혜능에게 전해졌음을 확인했다. 결국 그들은 혜능에게서 가사와 발우를 빼앗아오기를 결정하고, 추격을 시작했다.
혜능은 승려 추격대를 간신히 피해가며 두 달여 만에 영남(조계)에 도착했다. 그러나 법석을 열고 선법을 펼칠 수 없었다. 목숨까지도 실 끝에 매달린 듯이 위험천만이었다. 조계에서도 혜능은 추격대를 피해 산속으로 도피하여, 수년간 사냥꾼들과 어울려 산속 생활을 해야 했다. 산속 도피생활은 사료(史料)에 따라 3년에서 17년에 이른다.
이 수년간의 산속 도피생활을 끝내고, 조계의 법성사에서 삭발 수계식을 거행한 후 정식 출가를 한 승려가 되었다. 그 후 조계에서 40년 가까이 자신의 선법을 펼쳐, 동아시아 불교사상 다방면에 걸쳐 거대한 영향을 끼친 남종선의 창시자가 되었고, 선종 제6대 조사라는 불교사적 반열에 올랐다.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자. 불교는 근본적으로 ‘자력해탈신앙’이다. 5조 홍인이 명확히 했듯, 가사는 전승의 증표일 뿐 한낱 ‘옷가지’에 불과하고, 불법 그 자체는 아니다. 한데 그 헌옷가지 때문에 전수자의 목숨까지 위협하는 일을, 세속을 떠나 불도를 구한다는 승려들이 저질렀다. 시정잡배와 뭐가 다른가!
땡추들의 패악으로 부처와 부처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땡추를 부처나 부처의 대리인쯤으로 여기고 숭앙하는 일은 더욱 어리석은 일이다. 땡추는 땡추일 뿐, 스님도 아니고 부처는 더더욱 아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인 스님은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그 손가락임을 빙자해 ‘사찰 통행세’ 등 재물에 눈 밝히는 땡추는 거부해야 함이 마땅치 않겠는가.
*이 글은 이은윤의 『육조 혜능평전』(2004)을 저본으로 삼았음을 밝힙니다.
<작가/선임기자, ouasaint@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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