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송원의 ‘천방지축, 세상을 논하다’ (34) 군자불기(君子不器)

조송원 기자 승인 2022.03.12 10:11 | 최종 수정 2022.03.14 17:21 의견 0
[NATV 국회방송] 캡처
[NATV 국회방송] 캡처

여름날, 도령은 대청마루에서 글을 읽는다. 하인은 변소에서 똥을 퍼 똥장군에다 지고 밭으로 가 거름으로 뿌린다. 게으른 책장 넘기기를 하다 도령은 게게 풀어진 눈으로 몸을 배배 비꼰다. 도령의 그런 모습을 하인은 비아냥댔다. “제길, 바람 잘 통하는 시원한 대청마루에서 책 읽는 게 무슨 일이라고!”

아차, 혼자 넋두리가 너무 컸다. 도령이 들었다. “이놈아, 책 읽는 게 얼마나 고된지 알고나 하는 말이냐. 너희 같이 ‘몸 쓰는 사람’이 책 읽는 수고로움을 어이 짐작이나 하겠냐만, 무지렁이는 어쩔 수 없어, 쯧쯧.” 땀은 쏟아지지 어깨도 욱신거리지, 다리까지 무거워지고 몸이 천근만근이다. 에라, 내친김이다. “똥장군 지는 고통만 하것소. 서방님이 똥장군을 어디 한 번이라도 져 봤소?” 쌤통이다. 울화를 내뱉고 나니 몸은 무거워도 마음은 후련하다.

어라, 이놈이 말대꾸라? ‘마음 쓰는 자’의 고통을 알게 해주어야겠다. 마침 책 읽기에 싫증이 도도하던 차였다. 도령은 작심하고 일렀다. “그래, 일을 바꿔해 보자. 내가 똥장군을 질 테니 너는 정좌하여 글을 읽는 흉내를 내어 보라.” 도령은 자리에서 떨치고 일어나 웃통을 벗어젖히고 똥지게를 잡았다.

“서방님은 지게질이 처음이시니 장군에 똥물을 반만 채우겠소.”하인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나이가 지긋한 만큼 노회하다. 그리고 우물로 가서 목물을 하고, 삼베 저고리를 걸치고, 책상 앞에 책상다리를 틀었다. 그리고 몸을 앞뒤로 흔들며 글을 읽는 시늉을 했다.

도령은 까짓것 하며 반만 채워진 똥장군 지게를 지고 거뜬히 일어섰다. 한데 두세 걸음 떼고 난 다음이 문제였다. 똥장군 안의 똥물이 출렁거려 좌로 비틀 우로 비틀 두 발짝 내딛으면 한 발짝 물러나야 하는 꼴이 되었다. 그래도 자존심에 비지땀을 흘리며 비틀거리며 대문을 통과했다. 그리고 하인의 눈길이 미치지 못하는 담벼락에 어렵사리 지게를 받쳤다.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며 얼굴이 뻘게졌다.

‘아랫것들은 꽉 찬 똥장군도 지고 내달리는데, 나는 고작 반통으로도 이 모양이라니.’ 도령은 기가 찼다. 풀기도 폭삭 꺼졌다. 구린내는 이미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아무 냄새도 느낄 수 없었다. 그래도 양반 체면에 가던 길 중동무이할 수는 없었다. 그러구러 어찌저찌 뒷골 밭에 다다라 냅다 똥장군을 부렸다. 마개를 뽑아내고는, 흩뿌리고 자시고 없이 그냥 콸콸 내용물을 쏟아 부어버렸다.

하인은 일각도 지나지 않아 엉덩이에 좀이 쑤셨다. 책상다리를 하고 있자니 발에는 쥐가 났다. 정말 상반신까지 배배 꼬였다. ‘책 읽는 일이 이렇게 힘들다니. 서방님도 참 고된 일을 하는구나!’ 터덜터덜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얼른 자세를 고쳐 앉음새를 바로잡았다. 땀범벅의 벌건 얼굴로 도령은 말했다. “자네 참 힘든 일을 하는구먼. 미안하네, 아까 심한 말을 해서.” “아닙니다, 서방님. 책 읽기보다는 쇤네는 차라리 똥지게를 지겠구먼요.” 둘은 마주보며 하하하 웃었다.

맞은편 이웃집에서 목수, 기능공, 잡부들이 집수리를 한다. 나는 서재에서 책을 읽는다. 사람들은 저들은 ‘일을 한다’고 하고, 나 같은 독서인은 ‘논다’고 한다. 마당에서 잡초만 뽑아도 일한다고는 안 쳐줘도, 논다고는 하지 않는다. 물론 사회나 타인에의 기여에는 빛과 어둠처럼 선명히 차이가 있다. 저들은 근력으로 현실태를 변화시킨다. 독서인은 ‘자신 안의 변화’만 추구할 뿐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으면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활동 후 눈에 보이는 변화를 만들어야 노동이고, 그 대가는 임금이다. 의식 안의 변화는 보이지 않고, 그러므로 노동이 아니고, 대가도 없다.

저들은 몸을 쓴 대가로 통장에 숫자가 불어나고, 나는 의식만 쓴 탓에 읽을거리 값으로 통장의 숫자가 줄어든다. 저들은 일을 마치고 ‘장모님치킨’에서 통닭에 생맥을 마신다. 나는 책을 덮고 서재에서 끼니 겸해 라면에 소주를 후루룩 홀짝인다. 군자 말년에 배추 씨 장사라도 해야 하나?

군자불기(君子不器)라 했던가! 군자는 도구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건 그냥 한문의 축자적 해석에 불과하다. 일본 학자 오규 쇼라이(1666~1728)의 풀이가 공자의 참뜻에 가깝다. “군자란 도덕적 인격체를 말하는 게 아니라 민民의 장長이 되는 리더를 말하며, ‘기器’ 아닌 ‘기器를 부리는 자’이다. 그러므로 기器는 백관百官을 말하는 것이며, 군자란 군주나 공경公卿을 말한다.” 주희(1130~1200)도 ‘불기不器’를 “한 가지 재예才藝에만 국한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했다.

조송원

물론 군자불기란 금언도 신분제가 철저했던 지난 시대의 유습일 뿐이다. 맹자는 ‘노심자치인 노력자치어인’(勞心者治人 勞力者治於人)이라고 했다. 마음을 쓰는 자는 남을 다스리고, 힘(근력)을 쓰는 자는 남의 다스림을 받는다. 모든 생산 활동은 서인(庶人) 이하가 담당하고, 소수 귀족은 그들을 다스렸다. 물론 방자하게 제멋대로 부려먹는다는 게 아니라, 왕도에 충실히 백성의 안녕을 위해 마음을 쓴다는 뜻을 내포한다.

역사의 발전인가? 한 가지 기예(技藝)를 가져야 제 한 몸 건사할 수 있고, 특출하면 선망의 눈길을 받는다. 늘그막까지 한 가지 기술도 기능도 익히지 못하고, 재능을 타고나지도 못한 간서치(看書癡)! 그러나 어찌하랴, 그렇게 생겨먹은 것을. 그냥 생긴 대로 제대로 늙어갈 뿐이다. 애이불상(哀而不傷), 좀은 슬프지만 그래도 마음이 상하지는 않는다.

<작가/선임기자, ouasaint@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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