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요인은 무엇일까? 이익과 공포이다. 대부분의 제왕들은 용인술의 핵심으로 이 두 가지를 사용했다. 나긋나긋 말 잘 들으면 당근을 던져주었고, 꼿꼿하게 대들면 가차 없이 채찍을 갈겠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었다. 제왕 자신의 이익이 기준이었다. 나폴레옹의 통치원칙도 다름 아닌 이익과 공포였다.
세상은 진화했다. 주권이 왕에서 백성으로 넘어왔다. 적어도 헌법상으로는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대통령은 그 국민에게 위임 받은 권한을 행사할 뿐이다. 현실에서 어찌 헌법적 가치가 제대로 실행되겠냐만, 글자 그대로 국민이 주인인 ‘민주주의’(民主主義) 국가에서는 분명 국민이 ‘갑’이고 대통령이 ‘을’이다.
실제 현실에서 국민이 명실상부하게 갑의 입장에 서는 때가 있다. 바로 선거철이고 투표할 때이다. 모든 세상사가 그러하듯, 갑이 정당한 권한 행사를 하는 경우도 있고, ‘갑질’을 막 해대는 경우도 있다. 정당한 권한 행사든 갑질이든 같은 가치(표의 등가성)를 갖고, 더 많은 지지를 받은 후보가 모두를 대표하게 된다. 하여 일국의 대통령은 그 국민의 거울이다. 곧 그 국가의 국민수준을 가늠케 하는 얼굴인 것이다.
한 선배에게서 뜻밖에 전화가 왔다. ‘막말과 무지와 거짓말’이 이렇게 명백히 드러났는데도 지지율이 왜 이 꼬라지냐는 것이다. ‘본·부·장’(본인과 부인과 장모) 문제를 알면서도 도대체 누가 왜 지지하냐며 ‘인간에 대한 신뢰’의 추락을 한탄했다. 또 한 선배는 무당이나 ‘××녀ㄴ’가 거들먹거리는 나라에서는 살 수 없다, 이민이라도 가야하는데 돈이 없으니, 산속에 토굴이라도 하나 마련해야겠다며 울분을 막 쏟아냈다. 더 험한(?) 말도 생생히 표출했지만, 문자화가 곤란해 접어둔다. 물론 내 자신도 결코 헛짚는 말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사람을 신뢰해도 되고, 토굴 만들 필요는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사필귀정(事必歸正)! 길이 어디 곧고 매끄럽기만 한가. 돌아 돌아가기도 하고, 움푹 구덩이에 덜컹거리고도 하지만 그 길은 기어이 목적지에 다다르게 해준다. 더욱이 집단지성이 활성화한 세상이지 않은가. 악성 세균도 햇볕에 드러나면(폭로), 박멸된다. 얕은 수의 손바닥이 햇볕을 가릴 세상은 이미 철 지난 지 한참이다.
유권자가 갑의 입장에서 후보자를 선택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이익과 정념이다. 이익은 적어도 선거판에서는 경제적 이익이라 풀어써도 무방하다. 이에 반해 정념은 그 내포가 좀 다양하다. 경제적 이익은 뒤로 미루고, 먼저 정념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정념(情念. passion)은 사람들이 품고 있는 감정의 총합을 말한다. 대표적인 게 열정, 혐오, 공포이다. 열정은 우리 역사의 고빗사위에서 물줄기를 바꾸는 큰 역할을 했다. 1997년과 2002년 대선에서 김대중과 노무현의 당선에는 민주화에 대한 열정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2017년 대선에서도 ‘나라다운 나라’ ‘비정상의 정상화’에 대한 열정이 문재인 대통령 당선에 기여를 했음을 기억한다. 그러나 2022년 대선은 양상이 다르다. 무엇에 대한 열정? 따라서 이번 대선에서 열정은 미미한 변수로만 작용할 것 같다.
2022년 대선에서 결정적 역할을 할 두 축 중 하나는 혐오 감정이다. 운율을 맞추려 혐오라고 했지만, 더 적확하고 알기 쉽게는 ‘미워함과 싫어함’이다. 미워하고 싫어한다는 감정은 강력하다. 이유나 원인에 근거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냥 밉고 싫다, 고 한다. 이러한 무조건적인 미움과 싫어함엔 대책이 무대책이다. 문재인과 그 정부와 이재명이 그냥 밉고 싫은 것이다. 경제지표는 코로나 시국에도 선방했음을 보여준다. 각종 사회지표는 이 정부에서 호전일로이다. 국격은 상승해 자타가 공인하는 선진국에 진입했다. 그러나 그들은 일부러 이런 객관적 사실에는 눈 감는다. 정권교체라는 미명으로 자신의 혐오감정을 합리화한다.
대중이 품고 있는 이 미워함과 싫어함, 곧 정서적 반감은 수구기득권 카르텔에 의해 추동된 점이 많다. 특히 수구 언론의 역할이 지대하다. 세상과 현실을 굴절시켜 보여주기 때문이다. (수구기득권 카르텔이 왜 이재명 후보를 배척하고 윤석열 후보를 지지하는가는 ‘경제적 이익’에서 다루기로 한다.)
“경제적 이익은 몹시 미워하는 대상에 대해 화풀이하여 얻는 만족감만큼 본능적으로 매력적이지 않을 수 있다.” 판카즈 미쉬라(Pankaj Mishra) 블룸버그 칼럼니스트가 ‘더 코리아 헤럴드’의 칼럼(2022.2.24.)에서 한 주장이다.
이재명 후보가 싫고 밉다. 윤석열 후보는 미덥지 못하다. 이재명은 똑똑하고 윤석열은 무식하다. 아마 경제는 윤석열보다 이재명이 더 잘 다룰 것이다. 그러나 윤석열을 찍어 이재명을 떨어뜨려야겠다. 불확실한 경제적 이익보다는 미워하는 이 후보에 대한 화풀이, 응징이 더 기분 좋다. 판카즈 미쉬라의 말을 2022년 대선판으로 풀면 이렇게 된다.
특히 그들에게는 정치적 효능감이 부족하다. ‘그놈이 그놈이다’란 말로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한다. 이 결과가 현재 지지율을 설명한다. 기준에 턱없이 모자라는 윤 후보가 이 후보와 각축을 하는 이유이다. 분명한 건, ‘샤이 윤석열’보다 ‘샤이 이재명’의 비율이 더 높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서적 반감은 숨기기보다는 표출된다. 여론조사에서 그 반감의 표현 자체가 만족감을 주기 때문이다. 하여 오차 범위 내의 각축 지지율은 이 후보의 승리를 방증하는 데이터라고 해석할 수 있다.<계속>
<작가 / 선임기자, ouasaint@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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