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으로 말하면 아무리 매 맞고 얻어터져도 어느 하나 편들어 주지 않는 것이 ‘무속’이다. 기독교, 불교, 유교 등에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패거리로 달려들어 멍석말이하는 데 말이다. 최근 민주당 정청래 의원이 불교계에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무릎까지 꿇고 사죄까지 한 것을 보았다. 그러나 무속에 대해서는 무슨 말을 해도 아무리 짓밟아도 누구하나 나서 변호나 변론을 해 주지 않는다. 국적 없는 집시같이 무속은 아무런 보호책이 안 돼 있다. 무속 행위를 하는 장본인들도 자기 자신이 무속인이라고 내놓고 정체를 밝히기를 꺼린다. 그러나 요즘같이 선거철이 되면 누구 하나 무속인을 찾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프랑스 혁명이 기독교의 자유, 평등, 박애에서 나왔다고 하지만, 혁명 기간에 끼친 영향력 있는 책들은 공상과학소설, 프로노그래피, 메스머리즘, 최면술과 같은 비과학적인 책들이었다고 한다. 구한말의 동학혁명만 하더라도 최제우의 어릴 적 이름은 ‘복술卜術’이었다. 그리고 그가 민중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주술적 힘이 컸다. 사람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종이에 글을 써서 태워 물과 함께 마시게 했으며 그래서 병이 낫기도 했다. 동학농민혁명 발생의 종교·사상적 배경은 민간신앙인 무속과 미륵신앙이었다.
최제우가 태어난 곳은 경주 가정리, 전통적으로 유교 사상이 뿌리 깊던 곳이었다. 그러나 막상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한 곳은 전라도 고부였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고부는 예부터 무속과 미륵신앙이 강했던 지역이었다. 무속은 ‘제액초복 除厄招福’에 목적이 있다. 미륵은 ‘오탁악세 汚濁惡世’로 규정되는 세상에 언젠가 우리 중생들을 구제해 줄 것이라는 미륵신앙이 강세이던 곳이다. 또한, 동학의 교조인 최제우의 초기 행위도 주술적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 것과 일치한다. 유교와 불교가 쇠퇴하면서 무속과 미륵신앙과 같은 민간신앙이 고부에서 여전히 강세였다. 고부지역에 미륵불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는 것과 미륵 관련 지명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것 또한 농민혁명 발생배경이 미륵신앙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예수 생애의 대부분이 지금의 말로 하면 무속과 주술적이었다. 특히 최초의 복음서라고 하는 마가복음서를 보면 나자렛과 갈릴리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주술적으로 병 고치는 일들이 예수 생애의 대부분이었다.
문명사를 보면 기원전 6세기 전후 소위 차축시대axial age가 등장하면서 소크라테스, 붓다, 공자와 같은 철인과 종교가들이 나타나면서 한결같이 주술행위를 금했다. 즉 이성적 그리고 합리적인 자아가 등장하면서 하늘과 땅이 직접 소통하는 빙의 현상 같은 것을 금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가 델파이 신전에 올라가 주기적으로 제물을 바친 것이 사실이고, 공자의 어머니나 이모가 태산의 무당이었고, 공자 자신도 무속 춤인 팔일무八佾舞를 췄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나 공자는 인류 역사상 인간이 합리적 사고 그리고 거기에 기반한 윤리도덕을 강조한 인물들이다. 차축시대 대부분의 문화영웅들이 무속을 배제 혹은 배척한 것은 무시할 수 없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서 그 극치에 이른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대에 가장 배척이 되는 것이 데카르트의 이 말이다.
그런데 차축시대보다도 500여 년이나 후에 태어난 예수는 차축시대가 폐기 처분한 주술행위를 과감하게 몸소 실행하고 실천했다. 예수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들도 예수의 본을 따라 주술적으로 병 고치는 일을 서슴없이 실행했다. 가브리엘 문하에서 정통 유대교 율법 교육을 받은 바울은 이런 주술 행위를 보고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은 기독교인들을 향해 ‘어리석고 미련하다’(고린도 전서 1장) 했지만 바울은 아랑곳 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런 주술 행위는 기독교 2000여 년 역사에 단절된 적이 없고, 중세기 가톨릭은 이런 주술행위 하는 사제를 ‘엑소시스트 exorcist’라고 서품할 정도였다. 한국에 들어 온 기독교는 마치 겨울에 식물이 온상이나 만난 듯이 무속종교가 되어 버렸다. 기독교가 앞장서 무속 타파를 외치고 있지만 얼마나 그 진의를 믿고 인정할 수 있을까? 굿판과 예배를 구별하기란 어렵게 돼버렸다. 교회에서 기복신앙을 빼 버리면 과연 영업이 될까?
불교의 경우는 법흥왕 때에 이차돈의 죽음을 통해 무속과 결별하는 것 같았지만 지금도 전국의 거의 모든 절에는 삼성당이나 칠성당 같은 재래 무속 종교의 흔적이 그것도 높은 장소에 모셔져 있다. 연전에 어떤 종정이 이들 전각을 모두 없애 버리겠다고 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다. 마을마다 토속 신을 모시는 ‘부군府君’이란 것이 있어서 유교 관리가 지방에 가면 바로 이 부군당을 먼저 찾아야 한다.
2022년 3월 9일 한국에는 20대 대통령을 선출하는 날이다. 갑자기 대선판에 무속 논쟁이 우리 사회를 달구고 있다. 무속과 정치 그리고 무속과 혁명은 도대체 어떤 관계인가? ‘against, and, of’ 이 셋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가? 지금까지의 예들을 통해 볼 때에 무속은 마치 불가피한 것 같고 지구가 끝날 때까지 무속 혹은 샤머니즘은 끝까지 근절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아니 더 극성해질 것 같다. 박용숙 교수는 전 세계 방방곡곡에서 가장 보편적인 종교가 무교라고 하면서 심지어는 이를 두고 ‘샤먼제국 Shaman Empire’이라고까지 했다. 로마제국도 몽골제국도 망했지만 샤먼제국은 망한 적이 없다.
앞으로 수많은 제국들이 나타났다 사라졌지만 이 샤먼제국도 결국 사라질 것인가? 과학이 발달하면 자연히 소멸될 것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지만 더 극성인 이유는 무엇인가? 박정희의 새마을 운동과 한강의 기적이란 무속 타파와 그 궤를 같이하였다. 새마을 운동으로 인해 동구마다 있던 성황당을 다 불태우고 부숴버린 기억이 아직 생생할 것이다. 조국 근대화란 이름으로 가장 피해를 당한 곳이 무속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탈현대화 postmodernism가 시작되면서 이성주의와 합리주의는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뉴턴과학은 상대성이론이나 불확정성 이론에 의해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서구인들은 아프리카에 가서 원시 종교를 다시 불러오기 시작했으며, 지금 할리우드는 계룡산 신도안같이 원시 종교 천국이 돼버렸다. 여기에 1980년대부터 정보화 시대와 4차 산업 바람이 불면서 가상과 현실 세계가 서로 상호 교접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무속과 주술이 당당히 과학의 이름으로 재방문한 것이다. 사이버 게임 세계는 무속적 내용물 없이 제작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 마당에 김건희의 무속발언이 다가오는 대선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모를 착잡한 심경으로 글을 쓰고 있다. 우리나라 무속인구는 대략 기백만에 달한다는 통계가 나오고 있다. 이들은 지금 두들겨 맞아도 침묵을 하고 있다. 트로이 목마가 성안에 들어왔을 때 그것의 처리를 두고 왕과 아들 간에 논쟁이 벌어지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아버지는 점쟁이들의 말을 듣고 목마를 불태우지 않기로 한 나머지 그 강하던 트로이가 멸망하고 말았다.
무속이 나라를 망친 예는 다 들 수 없을 정도이다. 1830년대 홍수전은 오랜 병을 앓은 다음 환몽에서 “손에 건곤의 살벌한 권한을 잡고 ‘사 斯’를 베고 ‘정 正’을 세워 백성의 고난을 풀라, 바닷가에 잠긴 용이 하늘을 놀라게 할까”(태평천국기의기)와 같은 말을 하면서 혹세무민하였다. 궁정에 무당을 불러들인 장희빈과 민비는 모두 병자와 정묘호란 그리고 일제 강점과 연관이 된다.
그러면 여기서 남는 의문은 어떤 경우는 무속과 정치 혹은 혁명이 성공적이고 바람직한 결과를 초래하지만 어떤 경우는 그렇지 않은가 이다. 지금 우리는 대선을 앞두고 이 판가름의 기로 앞에 서 있다. 무속은 무조건 배척만 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현실에 양 기능도 있는가이다. 한국의 무속인들 가운데는 그 어느 종교인들보다 고상하고 윤리적인 분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본다. 무속일수록 선을 권하고 악을 징계하는 ‘권선징악 勸善懲惡’이 강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민중들의 맺힌 한을 푸는 데는 어느 종교도 무속을 따라 배운다.
1980년대 초 무속인 김금화 여사가 미국 뉴욕 매디슨 광장에서 굿판을 벌리려 할 때 한국 대사관은 나라 망신이라고 금지를 시켰지만 벌린 결과 상상초월의 결과를 가져왔다. 미국같이 인종적으로 계층적으로 억압받던 민초들이 굿판에서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며 맺힌 한을 풀고 서로 얼싸안고 춤을 추었다. 그 후 대사관이 앞장서 한국 무속을 홍보하였다. 김금화 여사 이후 무속은 해외 대학에서 정규 과목으로 채택되었고 학위논문도 쏟아져 나왔다. 무속은 한국 문화의 아이콘이 될 정도이다.
무속과 정치 그리고 혁명에 관하여 논할수록 미궁에 빠져들고 판단이 서지 않는다. 관계가 밀접한 것 같으나 아무런 관계가 없고 오히려 역기능적 관계일 뿐인 것만 같이 들린다. 그러나 생각하기를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대선을 앞두고 우리의 생각을 더 진지하게 전개하는 것은 우리의 미래와 밀접하게 연관이 되기 때문이다.
성공적으로 무속과 정치가 연관된 사례에서부터 거기에 참여한 주인공들의 면모를 보면 한 가지 공통된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혁명의 3단계인 경강증, 대혁명, 대정화의 3단계를 모두 성공적으로 경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최제우의 유년기 이름은 복술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복술卜術-제선.제우濟宣.濟憂-수운水雲으로 변한다. 복술卜術은 철들기 이전의 장수와 재복을 추구할 때의 무속적 이름이고, 제선은 도가의 신비주의에 탐닉할 때의 이름이고, 제우는 그가 구한말 망국의 사회분위기가 민중들의 참상을 보고 난 다음의 이름이고, 수운은 종교적 한울님 체험한 다음의 이름이다.
이들 단계를 거친 다음에서야 동학혁명은 가능했다. 그리고 이름 변화와 함께 자아도 변했다. 그래서 어느 한 층의 버림 없이 수운의 내부에 축적되었다. 복술에서 제우로 이름을 바꾼 것은 그가 가정사를 비롯한 참혹한 역경을 겪은 다음이다. 예수의 탄생을 보면 어머니 마리아가 천사로부터 앞으로 그가 메시아 될 것이라는 수태고지의 신탁을 받고 태어나지만, 예수는 헤롯당과 로마정부와 바리새교인들로부터 박해를 받고 십자가형으로 죽기까지 한다. 신탁과 십자가와 그리고 부활로 이어지는 예수의 생애도 환상적 요소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예수의 생애에서 이들 삼자는 분리될 수 없다.
이 마당에 북한의 혁명가극 ‘꽃파는 처녀’를 생각해 본다. 꽃파는 처녀 주인공이 삶에서 절망한 나머지 거리의 점쟁이를 찾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가극에서 이 장면을 볼 때에 종교를 아편이라 하는 마당에 어떻게 점을 치는 것이 가능할까 의아해 할 것이다. 점쟁이의 말은 “어머니 병도 다 낫고, 감옥에 간 오빠는 돌아오고... 귀인이 나타나 도와줄 것이니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주인공은 얼굴에 작은 미소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간다.
점쟁이의 말과는 달리 고난의 고난이 끝없이 연속될 뿐이다. 그러나 점쟁이 말대로 오빠는 귀인을 만나 항일혁명 투쟁에 참여, 승리한 전사가 돼 집으로 돌아온다. 1930년 오가자에서 처음 공연된 이 가극은 무속과 승리와 영광을 연관시키고 있다. 점 자체는 의미가 없고 그것이 사회변혁의 자기예시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그 과정에서 동생이 지주에 맞아 눈까지 멀게 되는 참혹한 장면을 무속과 함께 읽어야 할 것이다.
하비콕스는 이러한 혁명의 세 단계를 ‘경강증 cathalepsis’, ‘대변혁 catastrophe’, ‘정화 catharsis’라 한다. 인간들은 부조리와 불평등의 갈등에서 심한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이러한 상태를 경강증이라고 한다. 경강증 다음에 떨치고 일어나 대변혁을 일으키는 데 참가하는 것이다. 대변혁의 과정이란 혁명의 과정이며 십자가의 죽음 같은 가난, 박해, 억압을 겪는 과정이다. 대정화란 대변혁 다음 질서가 회복되어 평온을 찾는 과정이다,
무속과 정치와 혁명이 성공적으로 잘 조화된 경우란 필수적으로 이 세 단계를 경과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장희빈, 민비, 신돈, 홍수전 같은 인물들이 무속으로 정치를 하다 실패한 경우란 다시 말해서 자기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를 불행하게 만든 사례란 모두 이 세 단계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경강증에서 대정화로 바로 건너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고난의 십자가의 길 없이 메시아가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김건희는 어떤 신분의 변화가 있을 때마다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지금 신문지상에 보도된 것만 하더라도 60-70평 아크로비스타 아파트에 살고 있으며 어머니와 함께 수많은 곳에서 부동산 투자를 하였고, 도이치 모터스 주가 조작으로 억대의 차익을 챙겼으며, 권력 있는 검사와 해외여행도 자유롭게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은 유력한 대선후보의 아내가 되었다. 녹취를 통해 볼 때에 인생역정의 전환이 있을 때마다 무슨 법사, 도사, 점쟁이들이 있었다.
과연 이런 인간 부류들의 손에 무속이 쥐어졌을 때 어떻게 될 것인가. 가운데 과정 대변혁 고난의 과정을 뛰어넘어 첫 번째와 세 번째를 바로 연결시켜 버린 경우 말이다. 김건희는 무속인들과 이런 짓을 한 것이다. 이필재 난에 참가했다 붙잡힌 영해 주민들의 공소장을 보면 한결같이 ‘우주의 조화’, ‘음양의 조화’, ‘건곤의 조화’를 위해 난에 참가했다고 한다. 마치 무속인들이 하는 말과 하나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들은 심한 고문 끝에 모두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대정화를 보지 못하고 두 번째 단계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김건희와 윤석열, 진정으로 청와대 안방을 차지하고 싶은가? 고난의 행군부터 하고 나오시라. 그러면 영빈관을 옮기지 않아도 될 것이다. 진정한 도사와 법사라면 이들 부부에게 십자가의 길부터 강의했어야 할 것이다.
김건희와 윤석열의 일생에서 우리는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언덕을 올라가는 장면을 찾아볼 수 없다. 실로 위험천만이라 아니할 수 없다. 김건희와 꽃파는 처녀를 함께 생각해 본다. 둘은 다 같이 점을 보았다. 그런데 그 점괘가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무속 없는 혁명은 생명력이 없고, 혁명 없는 무속은 그 자체가 마약이고 아편이다. 동학농민혁명도, 삼일운동도, 촛불혁명도 그 이면에 춤과 노래가 있었고 그것은 하나 무속적 정서와 다른 것이 없다. 북한 아리랑 축제도 그 이면에 민족 문화가 아로새겨진 그대로 담겨 있지 않은가? 무속은 말 그대로 하나의 강한 제국이다. ‘스타 워즈 Star Wars’를 보라. 주인공 ‘제다이 Zedi’는 신선 같은 존재가 아니던가? ‘에이 아이 AI’란 기계 속에서 튀어나온 귀신들이다. 앞으로 인류는 이들 귀신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우리나라가 선진국 대열에 올라서고 한류가 성공하는 것도 모두 샤먼제국의 종주국이 바로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부디 이번 대선에서 무속을 잘못 이용한 무리들을 징벌할진데 결코 무속 자체를 그렇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진보와 보수 모두가 무속에 대해 몰지각한 데 분노하면서 글을 마친다. 사물놀이와 같이 우리나라 민속이 재부흥한 시기가 1980년 광주항쟁 이후부터란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란다.
<전 한신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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