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다운(top down)은 보텀업(bottom up)을 결코 이기지 못한다
김상일(전 한신대 교수)
1일 이곳 미국 시간으로 아침에 단일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아마도 한국의 지인들은 아직 잠들고 있을 때였다. 마음 추스르는데 좀 어려웠다. 그러나 ‘보텀업’(bottom up) 그리고 ‘로컬리 루티드’(locally rooted), 이 두 말이 마음에 승기를 잡게 했다. 전자를 ‘상향적’ 그리고 후자를 ‘민초에 뿌리를 둔’이라고 번역해 본다. 전자의 반대말은 ‘톱다운’(top down)일 것이다.
윤석열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하면 자유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있는 자와 배운 자들이 이들에게 자유가 무엇인지 가르치고 부여해 주어야 한다고 했다. 뿌리 깊은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에 근거한 사고방식이었다. 그리고 이런 민족개조론은 세기의 초부터 일본이 조선 침략의 구실로 삼아 오던 이론이다. 그러나 우리가 존경한다고 하는 대부분의 민족 지도자들은 그 유래도 모르고 근본에 있어서부터 민족개조론에 근거해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개조론은 지하수같이 우리 사회 깊숙한 내면 속에 흐르고 있다. 그것이 이번 윤석열의 입을 통해 분출돼 나온 것일 뿐이다. 민족개조론을 요약하면 top down적 사고 발상이라 할 수 있다.
윤석열과 안철수, 이 두 사람은 모두 서울대를 졸업, 부모들도 우리 사회의 상류 부유층 집안들의 사람들이다. 이들이 살고있는 주택은 대한민국 최고의 지역에 있고 고급 건물들이다. 신고한 재산은 수십억 내지 수천억 대에 이른다.
윤석열의 논리에 의하면, 자기들은 모두 자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그래서 자유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가르치고 분배하고 수여하는 자들이다. 그가 대통령이 되려한 이유도, 대통령이 된 다음에도 이런 top down다움을 보여줄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윤과 안이 단일화를 했다. 만약에 이들이 집권을 한다면 이들의 국정철학과 운영이 어떨지는 불문가지 不問可知이다.
이들 두 사람의 사고방식과 구조는 한마디로 말해서 ‘top down’이다. 위에서 아래로 지시하고 가르치고 수여한다는 말이다. 누구 하나 그리고 그 어디에서도 이런 사고방식이 나쁘다고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유교의 사서삼경 四書三經 가운데서 ‘대학’에서도 3대 강목 가운데 ‘신민 新民’이 있다. 위에서 배운 자와 가진 자들이 못 배우고 가진 것 없는 민초들을 날로 새롭게 가르치라는 것이라는 덕목이다. 조선조 500여 년이 바로 이런 주자의 사고방식과 사상이 우리 사회를 지배했다.
윤석열이 유세장에서 취하는 어퍼컷은 주먹을 위에서 아래로 쳐 누르고 다시 위로 쳐올리는 행위가 그의 하향적 사고방식을 그대로 시연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거기에 사람들이 환호하고 있다.
이재명 후보는 3월 3일 아침 단일화에 대해 정치는 정치인이 하는 것이 아니고 국민과 역사가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top down이 아니고 ‘bottom up’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밑에서부터 위로 생각하고 사고하는 상향적 사고방식이라 할 수 있다. 이번 대선은 극명하게 다른 사고방식의 주인공이 맞붙었다.
이재명은 안동 산골짝 동네에서 초등학교도 몇 시간 걸어 다닐 수 있는 곳에 태어나 자랐다.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와 고등학교도 진학할 수 없어서 소년공으로 검정고시와 주경야독으로 대학을 졸업했으며, 변호사가 되었다. 이재명의 이런 삶을 두고 ‘locally rooted’라고 한다. 이러한 삶의 배경에서 이 후보는 태생적으로 bottom up 사고를 하게 되었다고 본다.
윤과 안은 위에서 두 사람이 단일화를 하면 국민들은 들쥐같이 따라 올 것이라 판단했지만, 이재명 후보는 정치는 위에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고 밑으로부터 국민과 역사가 하는 것이라고 한다.
주자학에 대하여 양명학은 ‘대학’의 같은 구절을 두고 신민이 아니고 ‘친민 親民’이라고 한다. 인간은 누구한테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고, 이미 인간의 성품 속에 다 갖추어진 지식인 ‘양지 良知’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이 양지를 스스로 알 수 있는 ‘양능 良能’을 모두 타고난다고 한다. 이를 양지양능이라고 한다. 선생이나 정치인이 할 일이란 산파 같이 아기가 저절로 나오도록 도와 줄 뿐이라고 한다. 사실 출산에서 아기는 거의 저절로 나오고 산파는 보조 역할을 할 뿐이라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생각이기도 한다.
어쩌면 같은 구절을 두고 주자학과 양명학은 이렇게 다르게 해석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현대 교육철학에서도 이 두 가지 방법은 평행선이다. 죤 듀이의 실용주의는 다분히 양명학적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열린 교육’을 통해 양명학적 방법을 시행하려 했으나 조선일보 등은 이를 적극 방해하고 가로막고 있다. 여전히 주입식 교육이 강남 8구를 지배하고 있으며 이 지역을 대표하는 사람들은 이런 주입식 방법으로 기득권을 유지하려 한다.
1921년 만주 길림 공설운동장에서 안창호 선생이 민족개조론 연설을 하자 젊은 청년들이 거세게 반대해 벽에 부딪힌 적이 있다. 그러나 인격자 안창호 선생은 이들 청년들의 생각을 높이 평가하고 행사장을 떠났다고 한다. 윤과 안의 단일화는 단순히 대통령 선출이라는 것을 떠나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를 고스란히 유지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볼 수 있다.
안타깝게도 퇴계 선생은 양명학을 반대하는 글을 전국 서원에 보내 정재두 같은 양명학자들을 핍박했으며 양명학 책이 불살라지기도 했다. 그러나 정다산 같은 실학자들이 양명학을 수용했으며 실학의 근저가 되는 사상이 되었다. 일본에서 명치유신을 가능하게 한 주동 세력이 모두 양명학자들인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양명학의 비조 왕양명은 적들의 공격을 받아 숲속에서 사경을 헤매면서도 양지양능의 진리를 깨닫고 ‘알면 행해야 한다’는 지행합일론 知行合一論의 이론 정립가가 되었다. 퇴계의 선택이 결국 실학을 어렵게 만들었고 유생들은 말 그대로 ‘샌님’이 돼 남을 가르치고 가리키기만 한다. 대청마루에 긴 담뱃대 물고 호령이나 하면서 손발에 티 하나 안 묻히며 종들을 부려 먹었다. 결국 나라는 망했고 일제는 우리에게 망국적 민족개조론을 주입시켰던 것이다.
자기들은 양명학 친민으로 유신을 해 근대화를 해 놓고는 우리한테는 신민을 강조 내지 강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한론자들의 이런 속셈을 파악하지 못한 이 나라 지식인들, 특히 이광수와 최남선 등은 민족개조론에 동조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1930년대 일제가 만주에서 음모한 민생단 사건에 적극 가담하기도 했던 것이다.
3월 9일 대선이 어느 때보다 두렵다. 일본 자위대의 한반도 진출을 대선 토론회 장에서 버젓이 주장한 후보에 +1 단일화가 이루어졌다. 바라기는 아직 남은 기간 동안 큰 변화라도 생겨나기 바란다. 그 무엇보다 top down 사고를 국정 전반에 적용할 후보가 정말 두렵다.
그러나 위로가 되는 것은 역사에서 ‘top down’이 ‘bottom up’을 이겨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고 김대중 대통령은 그 살아있는 예로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서양 양복은 원래 서양의 농민들이 입던 작업복이었다고, 귀족들은 연미복을 입었지만, 전자가 후자를 몰아내고 지금의 농민 작업복이 신사복이 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결국 민중의 문화가 귀족 문화를 이긴다는 것이다. 여기서 김대중 대통령의 ‘행동하는 양심’은 bottom up다움이라 할 수 있다.
bottom up이란 상향적 사고방식의 뿌리는 풀뿌리에 근거를 둔 locally rooted라고 할 수 있다. 이재명 후보의 유세장에 모여드는 개미군단들을 바라보면서 이들이 단일화 산성을 혁파하고 승리할 것이라 기약해 본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을 가능하게 한 ‘레미제라블,’ 1882년 동학 농민군들, 1919년 삼일운동 시민들, 2017년의 촛불시민들 이들은 모두 locally rooted and bottom up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후보의 bottom up다움은 3일 영등포 유세장에서 “정치는 정치인들이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국민이 하는 거다. 저는 국민을 믿는다”라고 밝힌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어 “백성은 군주를 물 위에 띄우기도 하지만, 언제든 뒤집어엎을 수 있는 강물 같은 것”이라며 “왕조시대에도 백성을 두려워했거늘, 민주국가에서 감히 정치인 몇몇이 이 나라 운명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겠나”라고 반문했다.
2002년 한 부잣집 아들이 상고 출신을 배신할 때 12월 18일 그 추운 날 새벽까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투표 불과 8시간을 남겨 놓고 우리는 승리했다. 이순신 장군에겐 12척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에겐 아직 닷새가 남아 있다.
<전 한신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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