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거寓居의 10여 리 거리에 다솔사가 있다. 봉명산(407m) 동쪽 기슭에 고즈넉이 자리 잡은 1500년 역사의 유구한 사찰이다. 휴게소에서 절까지의 호젓한 산길은 아름드리 소나무 그늘로 참 ‘걷기 좋은 길’이다. 절을 지나 봉명산 정상까지도 산행에 안성맞춤이다. 여느 산과 마찬가지로 소나무가 햇볕을 가려준다.
지인들과 다솔사로 바람 쐬려 간 적이 있다. 다솔사를 둘러보고 내친 김에 정상까지 걸었다. 되짚어 내려오는 길에 한 지인이 말했다. “소나무가 많아 절 이름이 다솔사인가 보네.” 나도 예전엔 그렇게 생각했다. ‘솔’이 많고, ‘많을 多’자가 자연스레 연상되니 당연한 작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니, 솔은 고유어이고 소나무를 뜻하는 ‘솔’자는 없다. 한자를 확인했다. ‘多率寺’였다.
등산을 즐기는 친구가 대화에서 ‘비박’이란 단어를 종종 썼다. 나는 ‘非泊’으로 알아들었다. 자지 않고 밤새 산길을 걷는다? ‘산정山情에 취해서일까, 산매山魅에 씌어서일까?’ 자못 의아했다. 그러나 알고 보니 비박이란 독일어 Biwak으로, 등산 도중 텐트를 치지 않고 동굴·나무 밑·바위 그늘 등 눈비나 밤이슬을 피할 수 있는 곳에서 하룻밤 보내는 것을 뜻했다.
‘특별기여자’와 ‘뉴스페이스’가 무슨 뜻인지, 퍼뜩 알아볼 수 없었다. 유튜브의 자막에서 이 단어를 보고 헷갈렸다. 특별기에 웬 여자? 뉴스는 알겠는데 페이스는? 아마 자선 단체에서 일하는 사람은 ‘특별 기여자’로 읽었을 것이고, 우주 분야에서 종사하는 사람은 아마 ‘뉴 스페이스’로 금세 알아차리지 않았을까?
“극빈의 생활을 하고 배운 것이 없는 사람은 자유가 뭔지도 모를 뿐 아니라 자유가 왜 개인에게 필요한지에 대한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합니다.” 이 말을 씨부렁거린 사람의 인간됨됨이에 절망한다. 그가 얼마나, 뭘 배웠는지는 모르겠으나 ‘배부른 돼지’임이 분명하다.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이 『공리주의론』에서 한 말을 상기해 보자.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인간이 되는 것이 더 낫다. 만족한 바보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되는 게 더 낫다. 바보나 돼지가 다른 의견을 가진다면, 이는 오로지 자기 입장으로만 문제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인간이나 소크라테스는 양쪽의 입장을 다 이해한다.”
연구에 따르면, 아기는 두 살 정도가 되면 다른 아이가 고통을 받고 있는 광경을 보았을 때, 덩달아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가 장난감을 건네주거나 안아주거나 자기 엄마를 데리고 가서 달래주도록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공감은 동정(sympathy)과 다르다. 동정은 다른 사람의 곤경을 보고 측은함을 느끼는 감정을 말한다. 이에 반해 공감(empathy)은, 다른 사람의 곤경을 정서적으로 공유함으로써 촉발되고, 현재 그들의 조건을 따져본 후,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또 그렇게 되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 감정적 반응과 실천적 반응이 뒤따르는 것이다.
동양고전에서 공감에 해당하는 말은 ‘혈구지도絜矩之道’이다. ‘혈’은 헤아림이고, ‘구’는 목수가 쓰는 곱자, 곧 ‘ㄱ’자 모양의 직각자이다. 그러므로 내 마음을 자로 삼아 남의 처지를 헤아린다는 뜻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출전인 『대학大學』에 나오는 말이다.
주목할 점은 군자君子는 이 혈구지도를 지녀야 한다고 주장한 점이다. 군자는 ‘왕의 아들’도 아니고, 오늘날처럼 ‘학식과 덕행이 높은 사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춘추시대에서 군자란, ‘대부大夫 이상의 관장官長’의 존칭이었다. 시대상황을 고려해 거칠게 말하자면, 지방자치단체장이나 국회의원 이상의 정치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본·부·장’(본인, 부인, 장모) 리스크에 대한 설왕설래로 나라가 시끄럽다. 이 리스크들은 이미 드러났고, 앞으로도 심각하게 부각될 것이다. 문제는 이 리스크의 심층원인이 무엇일까, 하는 점이다. 이 리스크들은 빙산의 일각이다. 수면 아래에 있는 거대한 리스크는 바로 ‘공감능력의 결여’이다. 본인이든 부인이든 장모든,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눈곱만큼이라도 있었으면, ‘본·부·장’ 추문이 어디 생길 법한 일인가!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은 자유가 뭔지도 모르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고? 우리들의 부모들은 대부분 가난했고, 속칭 소학교도 안 다녀 문맹인 분도 많았다. 부모의 부모들은 더 가난했고, 더 못 배웠다. 그럼 우리 조상들 대부분은 ‘자유가 뭔지도 모르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는’ 개·돼지와 비슷한 노예근성의 인간이었단 말인가.
<작가/선임기자, ouasaint@injurytime.kr>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