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일랜드계 영국인 조지 버나드 쇼(1856~1950)를 생각하다 보면 명언(혹은 독설) 두 개가 퍼뜩 떠오른다. 그는 소설가나 극작가로서의 명성만큼 독설가로서도 이름이 높았다. 그의 묘비명이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라고 알려져 있다. 버나드 쇼의 향년은 94세이다. 이만큼 오래 살았으니 죽는 게 당연하지, 곧 죽음이 별 거 있나, 고 자신의 죽음까지 풍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버나드 쇼의 유체는 화장되어 그 재는 생전에 살던 집의 정원 곳곳에 뿌려졌다. 묘석 자체가 없었으니, 묘비명 따위는 남길 여지가 없었다. 한데 왜 존재할 수도 없는 묘비명이 세간에 떠돌까? 더구나 묘비명의 원문은,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이다. ‘우물쭈물’이라고 번역할 하등의 근거가 없다. ‘충분히 오래 살면, 이 따위의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 정도로 기계적 번역을 할 수 있다. 나이 90이 넘으면 이 정도 생각을 누구나 말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세계적인 미국 발레리나 안젤라 이사도라 덩컨(1878~1927)이 청혼하며 “내 얼굴과 당신의 머리를 물려받은 아이가 태어나면 근사하겠지요.”라는 말에 대한 버나드 쇼의 대답이 “아니오. 내 얼굴과 당신의 머리를 물려받은 아이가 탄생할 수도 있겠지요.”였다고 한다. 여성의 멋진 외모와 남성의 명석한 두뇌의 조합 결과에 대한 소망의 차이이다. 졸지에 이사도라 던컨은 외모는 훌륭하지만, ‘골빈’ 여자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사도라 던컨은 만만한 발레리나가 아니다. ‘자유 무용’을 창시한 현대 무용의 개척자이다. 어떤 분야든 새 길을 연다는 것은 대단한 뛰어난 사람이 아니고서 이룰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어린 아이들을 고통 받게 놔두는 한, 이 세상에 참된 사랑은 없다’는 명언을 남길 정도로 깨어 있는 여성이었다. 안타깝게도 이사도라 덩컨의 최후는 비참했다. 1927년 프랑스 니스에서 목에 두르고 있던 스카프가 자동차 뒷바퀴에 걸려 향년 50세로 질식사했다. 분명한 건, 버나드 쇼를 20년 이상 옆에서 지켜본 헤스캐드 피어슨이 쓴 평전에 따르면, 위의 문답問答은 그냥 정신이 좀 이상한 어떤 여성이 한 말이며, 이사도라 덩컨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이미지와 실체는 다르다. 사람에 따라서 그 괴리 정도도 다르다. 첫인상에서 받은 인물됨이 세월에도 바래지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완전히 잘못되었음을 세월이 증명하기도 한다. 첫인상은 이미지의 한 부분이다. 경력과 현재의 언행을 참작하고, 또 개인의 소망적 사고(所望的 思考. wishful thinking)가 작용하여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를 완성한다. 첫인상이나 소망적 사고는 지극히 주관적이기에 실체를 제대로 비추어주지 않는다. 경력은 상수이기에 재론의 여지가 없다. 한 사람의 실체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은 그 사람의 언행에 주목하는 것이다.
윤석열 후보의 행동에서 다른 정치인과 유다른 점은 무엇인가. ‘쩍벌남’, ‘도리도리’, 그리고 ‘건들거리는 품새’일 것이다. 보기 좋다고는 할 수 없으나, 이것만으로 그의 실체를 폄훼하기에는 석연찮다. 더 중요한 것은 ‘언어’이다. 우리의 생각이나 인격은 말로써 표현되고, 이 말로써 그 사람의 인격을 추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 후보는 작년 12월 29일 경북선대위 출범식 연설에서 다음과 같은 언어를 내질렀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서 국가와 국민을 약탈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재산을 뺏고 세금을 약탈하고 자기들끼리 갈라먹고···”
“나라 말아먹을 일이 있습니까? 그러니 그 사이에 전문가를 쓰겠어요. 전문가가 들어오면 자기들이 해먹는 데 지장이 있죠. 그러니 무식한 삼류 바보들을 데려다가 정치를 해서 나라 경제 망쳐놓고 외교, 안보, 뭐 전부를 망쳐놓고 그 무능을 넘어서서···”
“제가 이런 사람하고 국민 여러분 보는 데서 뭐 토론을 해야겠습니까? 하 참 어이가 없습니다. 정말 같잖습니다.”
“제가 볼 때는 대선도 필요 없고, 이제 곱게 정권 내놓고 물러가는 게 정답이지, 더 재밌는 거는 어떻게 이런 후보를 선출해 놓나 이 말입니다, 민주당이.”
소망적 사고란 사실이나 사건을 증거나 합리성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위 윤석열 후보의 발언들은 민주국가의 대선 후보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말들이다. 그러나 정권교체를 열망하는 사람들이 소망적 사고에 기대 이 발언들도 개연성이 있다고 믿으면, 발언의 진실 여부를 가려준들 윤 후보의 실체에 대한 자신의 고정관념을 바꾸랴.
그러나 작년 12월 28일 주한미상공회의소 간담회에서 한 발언은 소망적 사고가 개입할 여지가 없는, 윤 후보의 실체를 까발리는 말이다. “현 정부가 중국 편향적인 정책을 써와서 한국 국민들, 특히 청년들 대부분이 중국을 싫어하고 중국 사람들, 중국 청년들 대부분이 한국을 싫어한다.”
외교의 기본도 모르는, 대형 외교 참사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망언 수준의 발언이다. 윤 후보는 우리 경제나 중국에 진출해 있는 우리 기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이나 해보고 한 발언일까? 우리나라는 비록 안보는 미국에 기대지만, 경제에 대한 중국의 영향은 절대적이다. 2020년 기준 대중국 수출액은 수출총액의 25.8%에 이른다. 미국은 14.5%, 일본은 4.9%에 불과하다. 외교관을 ‘국익을 위한 거짓말을 하도록 외국에 파견된 정직한 사람’(an honest man sent abroad to lie for his country)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얼마나 더 많은 증거들을 목격해야 소망적 사고에서 벗어나, 윤석열 후보의 실체를 제대로 인식하게 될까? 물론 아무리 피하려고 발버둥을 쳐봐야 선거법이 정한 토론은 피할 수가 없다. 그 과정에서 그의 실체가 더욱 명증해지리니, 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터이다.
<작가 / 선임기자, ouasaint@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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