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 황홀경인 오르가슴과 깨달음의 황홀경인 법열은 그 속성 자체는 같다. 둘 다 뇌의 쾌감 중추의 작용이다. ‘성녀 테레사의 법열’(Ecstasy of ST. Terasa)을 보자. 테레사의 20대 시절, 기도 중에 불로 만든 창을 손에 든 천사가 나타나 사정없이 그녀의 가슴을 찔러댔다. 테레사는 상상을 초월한 신체의 아픔을 느꼈다. 그런데 테레사는 그때의 체험에 대해, “고통이 너무 심하여 큰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동시에 그때까지 느껴보지 못한 대단한 황홀감에 빠졌고, 나는 그 고통이 계속되기를 바랄 정도로 달콤한 상념에 빠졌다”고 회상했다.
1644년 조각가 잔 로렌츠 베르니니는, 테레사가 체험한 환시와 환각을 ‘성녀 테레사의 법열’이라는 작품으로 재현했다. 성적 오르가슴을 체험한 여성의 무아경에 빗대 종교적 신비경을 표현한 것이다. 종교적 신비체험을 통한 희열의 순간이 세속적 섹스의 절정의 순간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조각 작품을 통해 형상화한 것이다. 로마의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에 있다.
어떻게 해야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을까? 우선 ‘현재의 삶’을 추락시키는 불행이 없어야 할 것이다. 이 현재는 ‘과거의 누적’의 결과이다. 곧 가시나무든 장미꽃이든 과거에 심은 씨앗의 열매가 현재이다. 그러므로 현재는 과거의 보상 혹은 징벌의 의미를 갖는다. 과거 행위의 당연한 결과인 현재에서 행복을 누리지 못할 이유가 없다. 현재가 불만이라면 이건 욕심일 것이다. 그리고 이 ‘현재의 누적’이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그렇지만 개인의 삶과 행복은 개인적 행위를 넘어선 사회 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정치적 격변, 전쟁, 그리고 코로나19와 같은 팬데믹은 개인의 행·불행에 결정적이다. 다행히도 사람은 비교의 동물이다. 주위 누구나가 겪는 고통이면, 비록 유쾌하게 행복하진 못할지라도 결코 불행해지지는 않는다. 견딜 수는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노라면 더러 개인적 불행이나 불운에 맞닥뜨려지는 경우가 있다. 복불복福不福이지만, 이런 악운의 초대를 받지 않는 게 행복한 삶의 제1조건이 아닐까?
행복한 삶은 무덤덤한 삶이다. 곧, 행도 불행도 없는 삶이다. 그러나 일상의 무덤덤함을 견디며 행복해 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특출한 사람이다. 도인에 가깝다. 흔히들 도의 구현을 ‘배 고프면 먹고, 잠이 오면 잔다’고 한다. 진정으로 머릿속으로는 참임을 안다. 그러나 실행은 구만 리 밖의 일이다. 뭇 욕망에 휘둘린다. 일상의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 ‘가진 것’이 충분한데도, 더 가져야 한다는 강박감에 배 고파도 먹을 새가 없고, 잠도 줄인다.
역사 발전을 통해 인간의 능력은 무한히 확장돼 왔다. 과학 혁명, 생산력 증강, 의료 혁신 등등 우리는 실제 누리고 있다. 하여 수명도 길어지고, 삶의 질도 개선되었다. 그렇지만 중세의 사람들에 비해, 현대의 우리가 더 행복해졌을까? ‘인간의 행복’에 관해 관심을 갖는 역사가들은 드물다. 그러나 몇몇은 이 문제에 천착한 결과, 결론은 1년에 한 번도 목욕도 하지 않고, 해져 못 입을 때까지 옷도 갈아입지 않은 중세인들보다 우리가 결코 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행복치’(幸福癡)에 가깝다. 하여 인간의 행복에 기여하지 못하는 역사 발전은 어쩜 무용한 게 아닌가, 하는 우울한 전망을 하기도 한다.
행복한 삶에서 쾌락을 빠뜨리면, 팥소 없는 찐빵이 될 것이다. 대표적인 게 섹스의 감각적 쾌락이다. 문제는 섹스의 쾌락은 순간적이고 곧바로 허무 내지는 불쾌에 자리를 내준다는 것이다. 진화는 남자로 하여금 임신 가능한 여자와 성관계를 해서 유전자를 퍼뜨리면, 쾌감이라는 보상이 주어지도록 만들었다. 이 쾌감이 크지 않다면, 그렇게 수고와 노력을 들여 섹스를 하려는 남자는 드물 것이다. 더구나 섹스의 쾌감은 재빨리 사라지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만일 오르가슴이 영원히 지속된다면, 행복한 남자는 음식에 흥미를 잃은 탓에 굶어죽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행복의 귀중한 요소이다. 섹스는 사랑의 귀중한 요소이다. ‘사랑 없는 섹스는 맹목이고, 섹스 없는 사랑은 공허하다’. 그러나 기나긴 욕망, 순간의 쾌감, 그리고 또 기나긴 허무가 섹스는 아닐는지. 하여튼 오르가슴 혹은 쾌락은 행복의 본체는 아니고 작은, 선택적인 한 부분일 뿐이다.
도력 높은 고승들이 깨달음의 순간에 만끽하는 법열을 이야기한다. 오도송悟道頌도 많이 볼 수 있다. 독실한 신자가 정결한 마음에서 간절한 기도 중 황홀경을 느낀 종교적 신비체험 이야기도 종종 듣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법열은 일반적이지도 않고, 흔한 일도 아니다.
세속적이고 일상화된 법열을 느낄 수 없을까? 작은 일상의 업무 하나를 마무리 짓고 느끼는 홀가분함, 지인의 소원함에 야속했는데, 저간의 사정을 알고 보니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는 용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격언의 뜻을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돼 무릎을 탁 치게 되는 ‘아하 체험’(aha experience), 이익이 아니라 대의를 위해 투표했을 때의 당당함, 샛길에서 끼어드는 자동차에게 양보해 주는 따뜻함 등등 일상의 모든 일, 작은 일에서 갖게 되는 긍정적인 느낌들이 모두가 법열이 아닐까? 육체적·물질적·감각적 쾌락에는 반드시 사후 부(負,마이너스)효과가 만만찮다. 그러나 일상의 작은 법열들은 그에 따른 나쁜 효과는 없고, 더욱 행복감이 고양될 뿐이다.
어제 뿌린 씨앗이 오늘 열매를 맺었다. 가시나무든 장미꽃이든 상관없다. 자신의 선택 결과이기 때문이다. 하늘이 무너질 듯한 불행은 방문하지 않았다. 무덤덤한 일상, 최소한 불쾌·불행은 없다. 이런 일상에서 작은 법열들을 줍는다. 어쩜 우린 이미 행복할 모든 조건을 완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기적은 창조하는 게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라고 한 말을 기억한다. 이처럼, 행복은 애써 창조할 대상이 아니라, 일상에서 찾아내어 줍는 게 아닐까?
<작가, 선임기자 / ouasaint@injurytime.kr>
저작권자 ⓒ 인저리타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