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게으를 권리’는 없는가? 근면·성실이나 노력이 자신들의 안락한 삶을 보장하는가? 근면하고 성실하게 노력한 열매를 누가 차지하는가? 열심히 일해야 하는 대상은 누구이며, 이런 신조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버트런드 러셀은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주들은 게으르다. 그러나 그들의 게으름은 불행하게도 타인들의 근면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사실, 안락하게 게으름을 피우고자 하는 그들의 욕망이야말로 역사적으로 볼 때, 일해야 한다는 모든 신조가 생겨난 뿌리인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의 본을 따를 것이야말로 그들이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일 것이다.”
노예해방 전 대농장을 소유한 미국 백인들의 으리으리한 저택의 저녁 식사를 떠올려보자. 흑인 노예들이 땀 흘려 생산한 식재료를 집안 노예들이 요리해서 널찍한 테이블에 그득하게 음식을 차려놓는다. 백인들은 식사하기 전 반드시 ‘주기도문’을 왼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도대체 백인들의 하나님은 어떻게 생겨 먹은 존재일까? 백인들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식한인가. 자신들이 먹는 음식과 즐기는 안락한 삶은 오로지 흑인노예들의 피와 땀의 산물임을 모른단 말인가. 왜 감사기도를 하느님에게 올리는가. 흑인노예들을 부려서 잘 먹고 잘 살게 해 준 하나님이기에 감사하다는 뜻인가. 백인들의 믿음이 맞는다면, 백인들의 하나님은 분명 흑인은 개·돼지와 동급이고, 백인만을 인간으로 인정한 백인우월주의자일 것이다.
이 흑인 노예들은 어떻게 하여 고향 아프리카를 떠나 생면부지의 미국 땅에서 짐승 취급을 받는 노예가 되었을까? 설탕 농업의 거물들이 막대한 이윤을 누리려 고안해낸 기막힌 전략 때문이다. 노예무역 발흥의 원인에 대해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중세 유럽에서 설탕은 희귀한 사치품이었다. 그러나 아메리카에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이 들어서자, 점점 더 많은 설탕이 유럽에 들어왔다. 설탕 가격은 하락했고, 유럽인들은 단 것을 점점 더 좋아하게 되었다. 케이크, 쿠키, 초콜릿, 캔디 그리고 코코아·커피·홍차 같은 가당 음료였다.
하지만 사탕수수를 재배하고 거기서 설탕을 추출하는 것은 노동집약적 사업이다. 열악한 환경에서 장시간 노동을 하려는 사람은 드물었다. 계약직 노동자는 너무 비쌌다. 그래서 값싼 노동력을 찾다가 노예로 눈을 돌렸다. 노예무역은 정부나 국가의 어떠한 통제도 받지 않았다. 그것은 순수한 경제사업으로서, 수요 공급의 원칙에 따라 자유시장에 의해 조직되고 자금 조달이 이뤄졌다.
16세기에서 19세기까지 약 1천만 명의 아프리카 노예가 아메리카로 수입되었다. 이 중 약 70퍼센트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다. 노동 환경은 끔찍했다. 대부분의 노예는 짧고 비참한 삶을 살았다. 그 외에도 노예를 포획하기 위한 전쟁이나 아프리칸 내륙에서 아메리카 연안으로 노예들을 옮기는 과정에서 수백만 명이 추가로 사망했다. 결국 오로지 이윤 혹은 돈벌이 때문에 아프리카 흑인을 사냥, 사고파는 대서양 노예무역이 발흥한 셈이다.
19세기 들어 노예무역이 철폐된 이유는 무엇일까? 자유와 이성의 진보와 같은 도덕적 동기 덕분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도덕적 동기 때문이 아니라, 산업혁명이 빚어낸 산업구조 및 경제구조의 변화로 인해 더 이상 노예제가 경제적으로 예전과 같은 수익성을 갖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개인의 삶은 사회제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노예무역은 불법이 아니었다. 아프리카에서 잡힌 노예는 노예선의 선창에 짐승처럼 처박혀 대서양을 횡단했다. 노예가 그 비인간적인 처우에 불만을 제기했다면? 아메리카 농장에서 기계처럼 부림을 당할 때 휴식을 요구했다면?
노예 소유주들은 산 채로 바다에 던져 버리든지 죽음에 이를 정도로 두들겨 팼을 것이다. 그리고 법률가들은 합법적이라며 어떤 기소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노예들은 짐승 취급을 해도 좋은 소유주의 ‘재산’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법적으로는 아무 하자가 없는 행위들이다. 이처럼 법률가의 세계와 현실 인식은 기존의 법적 질서에만 관심이 있다. 그런 법률가들에게 인간적 고민이나 미래의 비전을 요구하는 일은 나뭇가지에서 물고기를 낚으려는 일과 마찬가지이다.
대한민국호의 선장을 뽑는 대통령 선거를 코앞에 두고 있다. 평생을 남의 잘못을 캐내는 일을 업으로 삼고, ‘법치와 공정’을 부르짖으면서 자신의 가족 비리 의혹조차 해소하지 못하는 법률가가 대한민국의 조타수가 된다면, 대한민국호의 항로는 어떠할까? 두려운 일이다.
<작가/선임기자, ouasaint@injury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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